[한마당-조용래] ‘우리학교’의 수난

입력 2013-01-29 18:51

“해방 후 우리말을 배우려고 했지만 돈이 없어서 학교를 세울 수 없었습니다. 그래도 동포들은 서로 돈을 내서 학교를 세우기로 했습니다. …우리들도 리어카를 끌고 고철을 주우러 다녔습니다. …학생은 40명 정도였는데 처음으로 하는 공부가 아주 재미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경찰이 들이닥쳐 그곳에 농장을 짓는다며 우리에게 나가라고 했습니다.”

1949년 봄 일본 시가(滋賀)현의 한 ‘우리학교(민족학교)’ 6학년생이 쓴 글이다(‘교육투쟁 60주년 기념자료집’, 2008). 전후 200여만명의 재일교포들은 귀국 준비를 겸해 자녀들에게 조국의 말·글과 문화를 가르치려고 우리학교를 세웠는데 연합군국최고사령부(GHQ)는 일본의 요청을 받아들여 48년 초부터 우리학교의 존재를 부정했다. 일본 안에 다른 문화를 용인하지 않겠다는 게 일본 정부의 속내였다.

47년 10월 현재 일본 내 우리학교는 초등학교 541곳, 학생 수 5만7961명(고교 8곳 등을 포함하면 총 6만여명)이나 되는데 모두 폐쇄 통보를 받았다. 이에 교포들은 크게 반발했고 곳곳에서 항의투쟁을 벌였다. 48년 4월 오사카·고베 교육투쟁에서는 12일 동안이나 오사카부(府) 청사를 점거하기도 했으나 경찰의 발포로 1명이 사망하는 등 무참히 진압되고 만다.

발포사건 직후 일본 정부는 사태수습 차원에서 우리학교를 ‘각종학교’로 유도했다. 각종학교는 학교교육법 제1조에 규정된 학교, 유치원·초·중·고교·대학 등 이른바 ‘1조교’ 이외의 학교로 학교교육에 상응하는 교육을 실시하는 각종 시설이다. 각종학교는 일본 정부의 학습지도요령을 따르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우리말로 자율적인 민족교육이 가능한 반면 일본 정부 지원이나 보조금은 포기해야 했다.

그럼에도 수많은 우리학교는 각종학교를 부러 감수했다. 없는 살림은 교포들이 서로 도우며 채웠지만 재정난은 날로 심해갔다. 2006년 해맑지만 쇠잔해가는 풍경으로 우리에게 아프게 다가왔던 영화, 홋카이도의 한 민족학교를 배경으로 한 다큐멘터리 ‘우리학교’도 그 연장선에 있었다.

재정난을 이기지 못한 일부 우리학교가 1조교로 바뀌기도 했다. 오사카 금강학교와 교토국제학교는 85년과 2004년에 각각 1조교가 됐고 곧이어 지방정부 보조금을 받기 시작했다.

그런데 최근 일본의 우경화와 더불어 학습지도요령에 기미가요 제창, 히노마루 게양이 의무화되면서 이들 학교가 난관에 빠졌다. 일본 정부 보조금을 대체할 수 있는 방도가 없으면 이제 우리학교는 ‘남의 학교’가 될 판이다.

조용래 논설위원 choyr@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