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차인홍 (7) 선물받은 휠체어로 아태장애인대회서 금·은·동
입력 2013-01-29 17:23
일본 장애인 단체인 태양의 집 사람들이 나에게 선물로 휠체어를 내주었다. 목발을 짚고 다니던 때보다 훨씬 자유로워진 나는 운동을 시작했다.
재활원에 있을 때도 쓰레기통에다 공을 던져 넣는 운동(?)을 자주 했었다. 흙바닥에서 뒹굴면서 고무공을 패스하는 놀이도 기억에 남는다. 휠체어가 몸에 익은 뒤 공을 가지고 하는 운동을 자주 하면서 한국에 있는 재활원 친구들이 자주 떠올랐다. ‘이곳에서 다 같이 운동을 하면 좋을 텐데….’
일본에서 나는 일이 끝나면 곧장 체육관으로 달려갔다. 밤 11시까지 농구 탁구 등 휠체어를 타고 할 수 있는 운동은 모두 해봤다. 팀을 이뤄 호흡을 맞춰 득점을 하는 농구가 특히 매력적이었다. 흠뻑 땀을 낸 뒤 샤워를 하면서 느껴지는 즐거움도 컸다.
휴일에도 나는 혼자 체육관에 갔다. 운동에 재미를 느끼면서 몸에 근육도 생긴 것 같았다. 휠체어를 밀고 다니는 게 전보다 수월해졌다. 체육관에서 내가 농구를 하는 모습을 본 일본 체육계 관계자는 내게 대회에 나가라고 권유하기까지 했다.
“일본에서 아시아·태평양 지역 장애인 대회가 열리는데 한국 대표로 출전해보지 않을래요.”
당시 한국에는 장애인스포츠협회가 없어서 우리나라 장애인들이 공식대회에 출전하는 전례가 거의 없었다. 일본인 체육 전문가들이 나를 도왔다. 그들은 한국 대사관을 통해 우리 정부의 허락을 대신 받아줬고 출전에 필요한 운동화와 체육복을 구하는 데 도움을 줬다. 태양의 집에서는 “대회 준비를 열심히 하라”면서 오전에만 근무하고 남은 시간을 체육관에서 보내도록 배려했다. 그렇다고 월급이 줄어든 것은 아니었다. 또 일본인 전문 트레이너를 붙여줬다. 나는 1층에서 7층까지 경사로가 설치된 건물을 오르면서 속도를 체크했다. 내려올 때는 엘리베이터를 탔다. 엘리베이터에서 잠시 숨을 고른 뒤 다시 있는 힘껏 휠체어를 밀고 올라갔다.
트레이너들은 기록을 보더니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한참 서로 말을 주고받았다. 며칠 뒤 이들은 나를 체력측정기기가 마련된 스포츠센터로 데려갔다. 측정을 마친 뒤 이들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7층 건물을 반복해서 오르는 데 기록이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는 건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센터에서 측정해본 결과도 정말 체력이 좋은 걸로 나왔습니다. 특히 폐활량이 웬만한 운동선수만큼 뛰어납니다.”
자신감이 생겨 더욱 열심히 훈련에 참여했다. 3개월간 휠체어에 타이어를 매달고 달리는 운동 등을 쉬지 않고 했다. 훈련이 끝나면 팔에 힘이 빠지고 허리는 쑤셨지만 목표를 세운 만큼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기술연수생으로 밟게 된 일본 땅에서 체육인으로서의 가능성을 발견했다. 나는 1975년 일본 오이타에서 열린 제1회 아태장애인 경기대회에 한국 대표로 출전해 휠체어 장애물 경기, 800m 달리기, 소프트볼 던지기 부문에서 각각 금 은 동메달을 수상했다.
바이올린밖에 모르던 내가 일본에서 기술을 배우고 몸을 단련할 수 있는 기회까지 얻어 메달을 목에 건 것. 분명 나 혼자의 힘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나를 여기까지 인도해주시고 휠체어를 선물 받게 해주셨다. 하나님께선 나를 그렇게 사랑해주셨다.
일본에서 1년을 보낸 나는 전보다 밝은 모습으로 한국에 돌아왔다. 몇몇 친구들에게만 말을 건네던 이전과는 많이 달라졌다. 문제는 더 어려워진 현실이었다. 바이올린 스승인 강민자 선생님은 미국으로 이민을 가셨고 나는 더 이상 재활원에 머무를 수 없었다.
정리=김경택 기자 ptyx@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