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들 법정서 나와 ‘소통’ 첫 발 떼다
입력 2013-01-28 22:47
“법관의 독립은 ‘국민들로부터의 고립’이 아닌 ‘국민과의 소통’을 통해 얻을 수 있다.”
판사들이 법복을 벗고, 단상 아래로 내려와 시민들과 눈을 맞췄다. 서울 남부지법이 28일 개최한 ‘시민과 함께하는 법관 간담회’에서는 남부지법 이성호 법원장을 포함해 소속 법관 52명이 초청받은 시민 31명의 발언에 귀를 기울였다. 또 간담회 시작 후 약 40분 뒤에는 양승태 대법원장이 깜짝 방문해 자리를 함께했다. 양 대법원장은 당초 간담회 일정을 모르고 있다가 뒤늦게 이날 오전 보고를 받고 “그렇게 좋은 일이 있으면 나도 가봐야겠다”며 곧바로 남부지법을 찾았다.
양 대법원장은 “사법부가 사회문제 해결 기관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시민들의 신뢰를 받아야 하며, 신뢰 형성은 시민과의 끊임없는 소통과 교류, 협력을 통해 실현된다”고 말했다. 이어 “법관에게는 오직 가느다란 한 가닥 말총에 묶인 채 천장에 매달려 법관의 머리를 겨누고 있는 ‘다모클레스의 칼’만이 있다”며 “말총머리가 끊어지지 않게 국민의 신뢰를 받아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간담회에서 시민과 법관들은 성폭력 및 학교폭력 문제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법관들은 성범죄 양형에 대한 고민을 솔직하게 털어놨다. 남부지법 형사합의12부 김용관 부장판사는 “성범죄의 경우 피해자 진술이 유죄 증거의 대부분이기 때문에 누구 말을 믿어야 할지 판단하기 쉽지 않다”고 말했다. 이성호 지법원장은 “성범죄에 대한 친고죄가 폐지됐지만 법관들이 종전처럼 피해자와의 합의 여부에 비중을 둬 관대한 처분을 내리는 것은 문제”라며 “입법을 통한 ‘객관적 양심’보다 법관 개인의 주관적 양심을 내세워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시민 대표로 참석한 한국성폭력상담소 이미경 소장은 “성폭력 피해자가 증언을 위해 법원에 출석해 재판 과정에서 2차 피해를 당하지 않도록 제도와 시설에 좀더 신경을 써 달라”며 “재판장의 따뜻한 말 한마디가 성폭력 피해자 치유에 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간담회를 지켜보던 양 대법원장은 발언을 자청해 “재판부가 증거조사를 하면 ‘성폭력에 대한 인식이 없어 2차 피해를 고려하지 않는다’는 식의 비판이 일어난다”면서 “이는 형사사법 절차상 처벌하기 위해 꼭 필요한 절차”라고 강조했다.
이어진 학교폭력 토론에서 한 학부모는 “내 아이가 학교폭력을 당해 학교를 그만두고 심리치료를 받고 있기 때문에 가해자에게 진정한 사과와 금전적 배상까지 받길 원한다”며 법원의 화해권고 프로그램의 과정과 실효성에 대해 물었다. 이에 소년사건 전담 재판장인 주채광 부장판사는 “화해권고 조정은 가해자가 원할 경우에만 가능하고, 이를 통해 실제로 반성하는 가해 학생은 10∼20%에 그친다”며 “다만 그 반성하는 10∼20%의 가해 학생을 위해 이를 운영하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남부지법 관계자는 “법관들이 시민을 초청해 특정 사회 현안을 논의한 자리는 이번이 전국 최초일 것”이라며 “시민사회 및 지역공동체와 소통하고 협력해 사회문제 해결에 기여하는 법원을 지향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이사야 기자 Isaia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