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방우체국-캄보디아 김현태 선교사] (2) 캄보디아 사역을 시작하며
입력 2013-01-28 18:16
가난한 대학생들 학기 초 기도제목은 “등록금…”
지난해 10월 서거한 시하누크 전 국왕을 화장하는 예식이 2월 초에 있을 예정입니다. 많은 존경을 받던 분이라 아마도 전 국민이 애도할 것 같습니다. 화장식을 전후해 모든 관공서와 학교는 문을 닫습니다.
지금보다 젊은 시절 우리 부부의 가슴이 벅차오게 하던 말이 있습니다. “민족의 가슴마다 피 묻은 그리스도를 심어 이 땅에 푸르고 푸른 그리스도의 계절이 오게 하자.” 이 말을 들을 때면 지금도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처음 캄보디아에 와서 학생들을 만나던 날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피부는 까무잡잡하고 덩치는 자그마한 학생들이 저를 신기한 듯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는 저에게 호칭을 뭐라고 불러야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캄보디아도 동양권 나라라 윗사람의 이름을 잘 부르지 않습니다. 이곳 현지인 간사들도 ‘봉(형)’ ‘쁘온(동생)’하며 학생들과 어울려 지냅니다. 저는 좀더 쉽게 다가가는 의미로 ‘닥터 데이빗’이라 부르라 했습니다. 데이빗은 저의 영어 이름입니다.
한 학생이 한참 뒤에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처음 닥터 데이빗이라 부르라 해서 그렇게 부르긴 했어요. 하지만 윗사람을 그렇게 불러본 적이 없어서 닥터 데이빗이라 부르는 동안 심장이 두근거려 혼났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만남이 1년쯤 지났을 무렵 그 학생은 저를 ‘닥터 데이빗’이라 부르지 않고 ‘록꾸루’라 부르겠다 했습니다. 록꾸루는 선생님이란 의미로 윗사람에게 존경심을 담아 부르는 말입니다. 학생들이 그렇게 저를 자기들의 마음에 받아주었습니다. 자기들의 ‘록꾸루’로….
캄보디아는 앙코르와트와 킬링필드 때문에 한국에 제법 알려져 있는 나라입니다. 1992년 파리 평화 협정 이후 각국의 교회와 선교 단체들이 조금씩 들어와서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2002년부터는 본격적으로 선교사들이 들어와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어떤 분은 “전 세계 모든 NGO와 선교 단체, 교회가 들어와 활동하는 곳”이라고 말씀하더군요. 심지어 신천지 같은 이단들도 들어와 열심히 포교합니다.
캄보디아는 전 국민의 95%가 불교를 믿지만 태국 라오스 미얀마 베트남 캄보디아 등 인도차이나 반도 국가들 가운데 유일하게 헌법에서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는 나라입니다. 따라서 다양한 형태의 선교 사역이 이뤄지고 있습니다. 기본적인 교회 개척 사역부터 빈민구제, 교육, 의료, 스포츠, 비즈니스, 대학생 사역 등 아이디어가 있거나 마음만 먹으면 어떤 사역도 할 수 있는 곳입니다.
우리 가정은 대학생들 특히 의료계(의대, 치대, 약대, 간호대 및 보건의료계)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전도하고 제자화하는 사역을 주로 하고 있습니다. 이곳 캄보디아 CCC에서 현지인 간사들과 함께 동역하며, 각자 맡은 캠퍼스별로 사역을 합니다. 캄보디아에서 유일한 국립 의대인 UHS(University of Health and Sciences)와 국립 간호대인 TSMC(Technical School for Medical Care), 사립 의대가 있는 UP(University of Puthissastra)와 사립 간호대가 있는 첸라대학교(Chenla University) 네 곳의 캠퍼스를 대상으로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주로 UHS와 TSMC를 대상으로 사역하며 UP는 작년부터, 첸라대는 올해부터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캄보디아는 종교의 자유가 있는 나라지만 국민 대부분이 불교를 믿고 있고 많은 사회지도자들은 공공연히 불교가 국교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각 대학에서 전도를 자유롭게 할 수 있는 형편은 아닙니다. 특히 각 국립대학은 외부인의 출입을 통제하고, 외부인이 들어와 개인 전도나 소그룹 모임을 갖는 것을 종교활동으로 간주해 제한합니다. 그래서 아주 자유롭지는 않지만 조용히 들어가서 기존의 학생들에 섞여 모임을 갖거나 전도를 합니다.
우리 가정이 대학에 들어가서 학생들에게 전도할 때면 주위 경비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우리들을 관찰합니다. 그러다 전도를 못하게 하는 경우도 종종 있지만 매주 나가다 보니 서로 알게 돼 이제는 그냥 눈감아 줍니다. 그리고 가끔 학교 고위 관리가 지나가면 눈에 잘 띄지 않는 구석진 곳에 가서 하라고 우리에게 알려주기도 합니다.
학생들의 분위기는 3∼4년 전과 많이 바뀌었습니다. 처음 전도하러 갔을 때는 우리 모임에 나오라고 초대하면 대부분 기꺼이 나오곤 했는데 지금은 바쁘다는 핑계로 거절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프놈펜을 중심으로 경제가 지속적으로 발전하다 보니 학생들은 물질주의에 점점 더 많이 노출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영적 관심보다 당장 무엇을 준비해야 나중에 돈을 벌 수 있는지에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일종의 스펙 쌓기에 더 열심인 상황입니다.
대부분 대학들이 오전반과 오후반으로 나누어 수업을 하니 한 학생이 오전과 오후 각각 두 곳의 대학을 다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일부 사립대학은 저녁반도 따로 있다 보니 의대에서 공부(의대는 오전과 오후 모두 수업이 있습니다)하면서 저녁에 영어나 경영학을 배우러 다니는 학생들도 있습니다.
의과대학에 다니는 학생들도 보면 두 부류로 확연히 나뉩니다. 한 부류는 집안이 좋아 의대에 공부하러 온 아이들, 다른 한 부류는 시골에서 공부만 죽어라 열심히 해서 프놈펜으로 유학 온 아이들입니다. 이들의 삶은 여러 가지 면에서 확실히 구분됩니다. 차를 직접 운전하는 학생부터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학생까지, 최신형 스마트폰을 들고 다니는 학생부터 가장 싼 중고 휴대전화를 가진 학생까지…. 가난한 학생들은 어떻게든 외국인과의 관계를 통해 도움을 받아보려는 노력을 많이 합니다.
한국에서 우리 부부가 학교 다닐 때에도 가난한 학생들이 CCC 모임에 많이 나오곤 했는데 여기서도 가난한 학생들이 우리 모임에 많이 나옵니다. CCC 학생들이 가난한 것은 전 세계가 다 똑같나 보다 하곤 아내와 함께 웃기도 합니다. 매년 학기 초가 되면 등록금을 위해 기도제목을 내놓는 학생들이 많이 있습니다. 실제로 2년 전에는 2명의 학생이 등록금이 없어 휴학을 하고, 돈을 벌기 위해 시골로 갔습니다. 그럴 때면 마음이 무척 아파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주고픈 마음이 듭니다.
하지만 저와 제 아내가 학생 사역을 시작하면서 한 가지 세운 원칙이 ‘절대로 학생들과 돈으로 관계를 만들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저와 만나 성경을 배우고, 전도를 하는 것에 물질적인 관계가 들어가면 순수하지 못한 마음을 가려낼 수가 없다는 이유에서입니다.
학생들이 학비 때문에 휴학하고, 돈을 벌기 위해 시골로 가는 날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하나님, 제가 바른 길로 가고 있나요? 저 학생을 물질적으로 돕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데 제 욕심이 그 뜻을 막고 있지는 않나요?”
하나님이 뭐라 명쾌하게 답을 주시진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감사한 것은 그 학생은 한 해 뒤 다시 등록을 해 학업을 이어갔고, 저와는 여전히 학생과 ‘록꾸루’의 관계로 남아 있었다는 것입니다.
김현태 CCC 의대 담당 간사·헤브론 선교 병원 외과 진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