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을 넘어 미래한국으로 (2부)] “박정희 대통령과 45분 독대… 간호사 지원 약속받아”

입력 2013-01-28 14:08


1966년 1월 31일 간호사 첫 파독이 있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독일 마인츠대학병원 의사였던 이수길(84) 박사는 1965년 말 한국에 들어와 간호사 서독 취업 허가를 받아내고 간호사 선발도 마쳤다. 하지만 128명의 여권 수속이라는 또 다른 걸림돌에 직면했다.

이 박사는 “당시 중앙청 1층에 여권과가 있었는데 손으로 여권을 만들 때여서 시간이 많이 걸렸다. 각자 수속을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고 사람을 나를 수 있는 차량도 없었다”고 당시를 기억했다. 그때 김형욱 당시 중앙정보부장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파독 간호사 문제를 다룬 신문기사를 본 김 전 부장이 측근을 통해 이 박사를 찾은 것이다. 이 박사는 김 전 부장이 1962년 국가최고회의 운영기획위원장 자격으로 독일을 방문했을 때 직접 안내를 하며 인연을 맺었다.

중앙정보부에 들어서자 그는 대뜸 이 박사에게 “왜 이런 일 하면서 나에게 연락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이에 이 박사는 “하도 높고 무서워서 못했다”고 답했다고 회고했다.

이 박사는 “김 전 부장이 내준 차를 이용해 간호사를 일일이 실어 나르며 여권을 만들었다. 말이 128명이지 한 사람씩 서류 작업을 하는 게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김 전 부장의 주선으로 이 박사는 1966년 1월 12일 박정희 당시 대통령과 45분간 독대 기회도 가졌다. 박 전 대통령은 1964년 독일 프랑크푸르트 방문 때 잠깐 만났던 이 박사를 기억하고 있었다.

이 박사는 “당시 최덕신 주서독 대사가 박 대통령에게 ‘이 사람이 프랑크푸르트에서 외국 사람으로는 처음 대학병원에 취직해 일하는 유명한 의사’라고 내 자랑을 했나 보더라. 또 (소아마비 때문에) 다리를 절고 지팡이를 짚고 있었으니 인상이 남았던 것 같다”고 설명했다. 박 전 대통령은 이 박사의 얘기를 듣고 파독 간호사들에 대한 정부 지원을 약속했다.

이 박사는 모진 고난도 겪어야 했다. 1967년 ‘동백림 간첩단 사건’으로 한국에 끌려와 고문을 받은 것이다. 간호사들에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선전물이 정기적으로 우송되기 시작했고, 중앙정보부는 북한 지령을 받은 이 박사가 간호사들을 독일에 취업시켜 적화사상을 주입시키려 했다고 의심했다. 이 박사는 한국에 끌려와 조사받고, 혐의 없음이 밝혀진 뒤 4주 만에 독일로 돌아오게 됐다. 이후 김 전 부장은 이 박사에게 친필 사과 서한을 보내기도 했다.

이수길 박사는

함경남도 풍산군 출신인 이수길 박사는 3살 때 소아마비에 걸려 왼쪽 다리가 마비됐다. 1·4후퇴 때 부산에 내려온 뒤 검정고시로 의사자격시험에 응시해 합격했지만 국내 의료계의 학력 중시 문화에 염증을 느끼고 1959년 독일로 건너갔다. 독일 대학병원 교직원을 거쳐 소아과병원을 경영하면서도 의료사고 없는 명의로 독일에서 이름을 날렸다.

마인츠=한장희 기자 jhha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