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을 넘어 미래한국으로 (2부)] 이혜성씨 “韓간호사 수술할때 손 빨라 의사들에 인기 독차지”
입력 2013-01-28 14:14
“수술을 앞둔 독일 의사들이 수술 담당 간호사로 전부 제 이름을 써놓기도 했어요.”
1966년 1월 31일 독일에 온 1호 파독 간호사 이혜성(72)씨는 프랑크푸르트 대학병원 근무 당시 한국 간호사들에 대한 선호도가 높았다고 추억했다. 이씨는 “저뿐만 아니라 동료 간호사들도 모두 독일 간호사들의 시기를 받을 정도로 평판이 좋았다”고 말했다. 그는 “저의 경우 신경외과 수술실에서 주로 근무했는데 차분하고 손이 정말 빠르다며 의사들이 뇌수술 같은 중요한 수술을 할 때 저를 찾았다”고 말했다. 환자들도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주사도 아프지 않게 잘 놓는 한국 간호사들만 찾았다고 한다.
1차 때 온 간호사들은 한국에서 손꼽히는 엘리트 간호사가 대부분이었다. 서울 삼청동 금융연수원 자리에서 면접을 보고, 성모병원에서 에티켓 교육을 받은 이들은 나라를 대표한다는 사명감이 남달랐다. 이씨는 “당시 우리를 선발했던 이수길 박사도 처음 온 사람들이 잘해야 한다는 생각에 모든 것을 따져 뽑았고, 우리도 나라를 대신해 유럽에 왔다는 책임감이 컸다”고 말했다.
돈을 벌어 가족에게 보내기 위한 생계형 파독 간호사들이 많았고, 외국을 나갈 수 있다는 기대감에 지원한 경우도 많았다. 이씨는 “근무했던 한일병원은 월급도 많이 줬지만 유럽에 와서 견문도 넓히고 싶은 생각이 컸다”며 “동료 중에는 동생 공부시키기 위해 독일에 온 경우도 있었지만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한 사람이 많았고, 의사가 된 경우도 있다”고 설명했다.
44년 전 독일인 요르겐 에크하르트씨와 결혼해 프랑크푸르트 인근에 살고 있는 이씨는 한국을 몰랐던 독일인들에게 한국을 알리는 외교관 역할을 했다고 자부했다. 그는 “두 딸 모두 한국 엄마를 가진 것을 굉장히 자랑스러워했고, 헤이스트에서 시의원을 12년 한 남편도 기회 있을 때마다 시민회관을 빌려 한국 행사를 해 왔다”고 전했다.
이씨는 ‘라인강 언덕에 핀 무궁화’ ‘향기 제비꽃’ 등 시집과 수필집을 낸 작가다. 1996년 간호사 일을 그만둘 때까지 새벽에 틈틈이 시와 수필을 썼다. 그는 “한국말을 하고 싶은 때면 백지에 한글을 썼고, 외국에 오래 살면서 외국 땅에 묻힐 몸이지만 고국에 대한 그리움과 분단된 조국의 운명을 생각할 때 아파오는 마음을 표현한 것이 시가 됐을 뿐”이라고 겸손해했다.
◇이수길 박사는
함경남도 풍산군 출신인 이수길 박사는 3살 때 소아마비에 걸려 왼쪽 다리가 마비됐다. 1·4후퇴 때 부산에 내려온 뒤 검정고시로 의사자격시험에 응시해 합격했지만 국내 의료계의 학력 중시 문화에 염증을 느끼고 1959년 독일로 건너갔다. 독일 대학병원 교직원을 거쳐 소아과병원을 경영하면서도 의료사고 없는 명의로 독일에서 이름을 날렸다.
마인츠=한장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