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을 넘어 미래한국으로 (2부)] 선발 경쟁률 6대 1로 치열… 엘리트 간호사들 대거 지원
입력 2013-01-28 14:09
한국 간호사 파독은 민간 주도로 진행됐다. 1957년부터 독일 선교단체가 독일간호학교에 약 150명의 한국인 입학을 주선했고, 소수의 학생들이 3년 교육 과정을 마치고 간호사 자격을 얻어 병원에 근무했다. 하지만 이는 한국 간호사가 직접 독일에 건너가 취업한 것과는 다른 것이다. 1966년 1월부터 시작된 대규모 간호 인력의 독일행은 마인츠대학병원 소아과 의사로 있었던 이수길 박사가 사실상 이끌었다. 1969년 ‘한독간호협정’이 체결되기 전까지 그의 주도로 간호사 파독이 이뤄졌다.
첫 독일행 성사까지 “간호사 통해 한-독 양국 다리를 놓겠다” 고난 이겨내
이 박사는 한국 간호사 서독취업 사업을 65년 4월부터 시작했다. 당시 그가 일하고 있던 마인츠대학병원은 간호사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다른 독일 병원들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이 박사는 한국 보건사회부를 통해 한국에는 간호사 자격증을 가진 많은 사람이 직장을 찾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는 곧바로 독일 병원장들에게 한국 간호사 고용 요청 서한을 보낸다. 지난 8일 마인츠에서 만난 이 박사는 “내 편지를 받은 병원장 8명은 바로 만나자고 했지만 5곳의 병원장들은 내 제안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였다”며 “교섭과정에서 거만하거나 노골적으로 무시하는 병원장도 있어 실망했지만 간호사를 통해 양국에 다리를 놓겠다는 신념으로 참고 이겨냈다”고 말했다.
병원들과 교섭하는 도중 이 박사는 프랑크푸르트와 주변 병원 연합회 회장인 슐타이스 노르트베스트 병원장을 만나게 됐다. 또 노르트베스트 원장과 절친한 사이였던 사회민주당(SPD) 소속 브루네르트 당시 프랑크푸르트 시장도 소개받게 된다. 두 사람의 도움으로 프랑크푸르트시가 속해 있는 헤센주 정부로부터 한국 간호사 고용허가를 받았다. 또 프랑크푸르트와 마인츠대학병원에서 210명의 한국 간호사들을 채용하겠다는 계약도 따냈다. 이 박사는 이 과정에서 언어장애 등을 구실로 한국 간호사 봉급을 독일 간호사들보다 20∼30% 적게 주겠다는 병원장들을 설득하느라 애를 먹었다고 한다. 돈을 벌기 위해 독일에 오는 한국 간호사들에게 독일 간호사들과 동등한 봉급을 받게 하는 것은 가장 중요한 문제였고 결국 관철시켰다.
이 박사는 주독 한국대사관에 한국 간호사 취업주선을 요청했지만 이뤄지지 않았다. 이에 이 박사는 1965년 11월 휴가를 내고 자비로 한국에 들어왔다. 이만섭 당시 의원의 도움으로 오원선 보사부 장관을 면담해 간호사 서독취업 허가를 받아냈다. 66년 1월 12일에는 박정희 대통령과 45분 독대를 통해 정부 지원 약속도 얻어냈다.
128명 선발 까닭은 전세기 좌석 수 제약으로 초기엔 128명 단위로 파송
파독 간호사 선발 과정에선 치열한 경쟁이 펼쳐졌다. 경쟁률은 6대 1에 달했다. 65년 당시 외국에 나가 있는 사람이 외교관, 유학생 등 8000명 정도로 해외여행 기회도 없었던 터라 돈도 벌고 견문을 넓히기 위해 지원하는 엘리트 간호사들이 많았다. 탈락한 간호사들이 강력히 항의하는 소동도 빚어졌다. 미혼, 종합병원 근무 경력, 학력 등 조건도 까다로웠다. ‘얼굴이 예쁜 여자들만 뽑는다’는 흉흉한 소문이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다. 일부 지원자는 청와대 인사와 고위 관료에게 선발을 부탁했다는 얘기도 있었다.
이는 외국인 여성인력에 대해 까다로웠던 독일의 법과 제도 때문이었다. 독일은 1950년대 말에 ‘모성보호법’을 도입했다. 기혼 여성에 대해서는 출산장려금과 육아보조금을 지급할 뿐 아니라 임신이 확인된 여성 피고용인은 해고할 수도 없었다. 이 때문에 비용을 아끼고자 했던 독일에서 미혼 등의 조건을 내걸었던 것이다.
우여곡절을 겪은 후 이 박사와 최초의 파독 간호사 128명은 66년 1월 31일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도착했다. 초기에 이들은 항상 128명 단위로 파송됐다. 1차도 128명, 2차도 3차도 128명이었다. 비행기 좌석 수 때문이었다.
이 박사는 “당시 계약했던 전세기 총 좌석이 129석이었다. 그러니까 내 자리 하나 빼서 128명이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후 해외개발공사가 창설되고, 2차 간호사 파독부터는 헤센주 등을 대신해 이 박사와 개발공사 간에 고용계약을 했다. 이 박사가 간호사 628명을 취업시킨 후 한국기독교난민구제회장 이종수 박사도 간호사 416명의 취업을 지원했다. 67년까지 1120명의 간호사가 헤센주, 라인란트팔츠주 등 병원에 취업했다.
파독 중단 시기<1967년 8월∼69년 8월> 국내 병원 “간호인력 부족” 호소… 취업 저지운동 불거져
한국 간호사들이 대거 독일에 취업하자 한국의 의료기관에서 간호사 부족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67년부터는 한국과 독일의 종교단체들이 합세해 한국 간호사 서독취업 저지운동과 함께 일간지와 주간지에 광고를 냈다. 이 박사도 한국 간호사 서독취업 반대집회(Mission)에 참석해 해명을 해야 하는 곤욕을 치러야 했다.
독일 정부는 주한 서독대사를 본국으로 소환해 대책을 협의하는 한편 엘스터 독일간호협회장을 한국에 보내 현지조사를 진행했다. 엘스터 회장은 실태조사 후 1967년 5월 “한국 같은 개발도상국에서 대량의 간호사들을 서독으로 들여온다는 것은 문제”라는 결론을 독일 정부에 보고했다. 이에 독일 정부는 한국 간호사 서독취업을 금지하게 됐다.
이미 독일에 진출해 있던 간호사 일부가 근무계약을 어기는 바람에 새 간호사들이 들어오지 못하는 사태도 벌어졌다. 66년 말부터 미국 이민알선 브로커들이 독일에 상주하면서 병원에 근무하고 있는 간호사들을 미국, 캐나다로 빼돌리기 시작했다. 이 박사가 취업시킨 간호사 중 100여명이 미국과 캐나다로 빠져나가자 프랑크푸르트시는 이미 요청한 4차 간호사 128명을 받지 않기도 했다.
계약만료 후 교체<1969년∼76년 7월> 1976년 7월까지 간호사 5800명 포함 총 1만32명 취업
독일 정부의 고용 중단 방침에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은 한국 간호사를 고용하고 있는 병원들이었다. 1966년 독일에 취업한 간호사들의 3년 계약 만료시점을 앞두고 라인란트팔츠주 병원협회장 료리히 박사와 이 박사 그리고 주독 대사관 노무관이 만났고, 이들은 교체 취업에 대해 합의를 봤다.
이우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병원협회장 겸 서독병원 사무총장인 뮬러 박사도 이에 동의했다.
독일병원협회는 69년 6월 한국간호사를 고용하고 있는 병원에서 3년 근무를 끝내고 귀국하는 간호사들의 교체사업을 전담한다고 공고했다. 이후 76년까지 간호사 5800명, 간호보조원 4232명 등 총 1만32명이 독일에 취업했다.
마인츠=한장희 기자 jhha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