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차인홍 (6) 중학교 3학년 끝나갈 무렵 일본에서 초청장이…

입력 2013-01-28 17:16


충남도 콩쿠르에서 우승한 뒤 여러 연주회 무대에 설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어렵게 빌린 연주복을 입고 다른 사람의 부축을 받아 무대에 올랐지만 실수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음악적 자양분이 된 모차르트를 접하게 해준 사람은 평화봉사단원으로 한국에 온 미국인 젠 영 선생님이었다. 이 여자 선생님은 재활원에서 영어를 가르쳐주었을 뿐 아니라 바깥 구경에 목말랐던 우리에게 미군부대를 구경시켜 주기도 했다. 선생님이 미국으로 돌아가던 날 친구들과 함께 눈물을 펑펑 쏟았다.

그런데 이 선생님이 몇 개월 후 다시 재활원을 찾아왔다. “나를 간절히 기다리는 아이들의 얼굴을 다시 보고 싶었다”고 했다. 선물도 잊지 않으셨다. 큰 전축과 여러 장의 클래식 음반들.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시설이 없던 재활원에 선생님이 가져다준 선물은 감동 그 자체였다. 당시 전축은 부잣집에서만 구경할 수 있는 고가품 중의 고가품이었다.

중학교에 들어가지 못하고 재활원에 남아있던 나는 전축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며 우울한 마음을 달랬다. 초등학교 6학년 과정을 마친 재활원 어린이들은 중학교로 진학해야 했지만 나를 포함해 많은 학생들은 그럴 형편이 못됐다. 재활원 선생님들은 나를 비롯해 비슷한 상황에 놓인 학생들을 위해 계속 재활원에 머무르며 중학교 과정을 공부할 수 있도록 해주셨다.

오후 1시 수업이 끝나면 나는 빈 교실에서 전축을 틀었다. 모차르트의 바이올린 협주곡 3번이나 5번 음반을 턴테이블에 올려놓고 눈을 감았다. 모차르트를 들으면 내 두 발로 내달릴 수 없는 바닷가와 책에서 언뜻 본 듯한 외국의 금빛 들판이 머릿속에 펼쳐졌다. 셀 수 없이 들어 곡의 구성을 다 외울 정도였다.

중학교 3학년 과정이 끝날 때쯤 일본에서 초청장이 날아왔다. 초등학교 때 우리 합창단을 초대했던 일본의 장애인 단체인 ‘태양의 집’에서 보낸 것. 이번에는 5명에게 1년간 연수 기회를 준다고 했다. 태양의 집은 장애인들에게 기술을 가르쳐 스스로 자립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있었다.

선발 기준은 일본어 실력이었다. 단체생활의 엄격함에 지쳐 있던 나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또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 적지 않았고 앞날이 막막하기만 했던 그 시절 뭔가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다는 설렘이 있었다.

나와 몇몇 학생들은 일본어를 잘 하는 재활원 선생님께 일본어를 배웠고 일본 기술연수생 5명에 뽑혀 일본 벳푸 시에 있는 태양의 집에 들어갔다.

바이올린 연주자에게 1년의 공백은 크다. 하루만 연습을 걸러도 손끝의 감각이 무뎌지기 때문이다. 미래의 내 직업이 연주자나 지휘자라고 미리 알았다면 일본행을 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이었다. 주님께서 나에게 낯선 경험을 해보라고 일본 땅으로 보내주셨다.

1974년 12월 추운 겨울 일본의 모습은 충격적이었다. 계단밖에 보지 못했던 나는 그 큰 건물을 오르내리는 엘리베이터가 그렇게 신기할 수 없었다. 또 숙소에 도착해 흰 쌀밥과 고깃국, 바나나 귤 같은 음식을 맛볼 수 있어 행복했다.

입소한 뒤 ‘직장생활’이 시작됐다. 아침 8시부터 저녁 5시까지 일했다. 목공소나 인쇄소 일을 돕는 역할을 했다.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내가 처음으로 월급을 받고 일할 수 있다는 게 좋았다. 엄마 아빠가 보고 싶어 잠을 설친 적도 많았지만 어려서부터 재활원 생활을 했기 때문에 적응할 수 있었다. 내성적이던 내 성격도 조금씩 변화했다.

정리=김경택 기자 ptyx@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