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을 넘어 미래한국으로 (2부)] 정재훈 교수 “베껴서 될 일 아니지만 유럽복지 눈 돌릴때”
입력 2013-01-27 16:20
“독일복지를 배우자.” 정재훈(50·사진) 서울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이런 주장 앞에서 조심스러워한다. 1990∼99년 독일에서 사회복지를 배운 대표적 독일통. 아이 낳고 학교 다니며 받은 혜택까지 독일복지의 장점이야 누구보다 잘 안다. 하지만 ‘무조건 독일식이 좋다’는 말에 동의하지는 않는다. 제도는 베껴도 역사와 문화 이식은 불가능한 법이다. 한국과 독일은 경제구조가 다르고, 노동시장이 다르고, 가족 및 교육제도가 다르다. 무엇보다 복지체험의 역사가 다르다. 왜, 어떻게 다른지 알아야 독일의 성공도 이해할 수 있다. 지난 14일 서울 화랑로 연구실에서 정 교수를 만났다.
-독일 복지제도를 도입하자는 이들이 많다.
“베껴서 될 일이 아니다. 좋은 거 이것저것 들여와 탄생한 게 한국식 잡탕 복지제도다. 맥락이 다르니 같은 제도를 운영해도 다른 결과가 나온다. 한 가지, 정부와 민간의 관계는 눈여겨 볼 만하다. 독일복지는 대부분 민간 비영리기관이 실행한다. 한국 역시 정부가 보조금 주고 민간이 손발을 맡는다. 차이라면 한국 민간기관은 영리를 추구한다는 거다. 비급여 의료비 팽창, 보육 및 요양의 질 하락은 민간이어서가 아니라 영리기관이어서 발생한 문제다. 그렇다고 한국에서 갑자기 국·공립시설을 늘리기는 쉽지 않다. 독일식 비영리기관이 대안일 수 있다.”
-2009년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 독일의 성공 비결을 진단하자면.
“복지는 결국 재원이다. 1980년대 이후 환경·에너지 분야에 투자해 미래지향적 산업이 튼튼하게 육성됐다. 여기에 통일효과가 보태졌다. 서유럽 국가들이 싼 노동력을 찾아 동유럽으로 몰려갈 때 서독 기업들은 동독의 노동시장을 활용했다. 덕분에 실업률이 낮아졌고 복지비용 감소로 이어졌다. 복지를 일자리와 연계시킨 2004년 하르츠개혁도 성공적이었다. 실업자를 돕되 ‘미니잡’이라고 불리는 월 400유로(약56만원) 이하 비정규직 근로와 연계시켰다. 일을 거부하면 지원금을 깎았다. 물론 ‘질 나쁜 고용’이라는 비판도 있었지만 복지를 일자리와 연계시킨 건 긍정적이었다.”
-400유로로는 생계가 불가능하지 않나.
“일자리만 보면 미니잡은 지속가능하지 않다. 하지만 미니잡을 가진 실업자에게는 주거비·의료비·교육비가 지급된다. ‘일 안 하면 굶는다’가 아니라 생존을 보장한 뒤 근로를 유도했다. 독일의 미니잡은 뼈빠지게 일해 번 70만∼80만원으로 알아서 생존하는 한국의 비정규직과는 완전히 다르다. ‘일하면 나머지는 책임지겠다’, 그게 독일식 복지다.”
-그 일마저 할 수 없다면.
“전통적인 대인서비스가 구제한다. 기독교봉사회 등 6개 민간 복지단체들이 정부와 손잡고 여러 가지 복지 서비스를 제공한다. 이들 역할이 아주 크다. 역시 오랜 전통이 있어서 가능한 일이다.”
-아메리칸드림과 유러피언드림. 둘 중 한국 사회의 미래는 무엇인가.
“사회복지 전문가들은 미국식 접근법의 시대가 저물어가는 것 아니냐, 그렇게 판단한다. 독일도 미국식 경쟁을 도입한다지만, 기본 전제가 다르다. 기초보장은 확실히 하고 그 위에서 경쟁하는 거다. 미국처럼 탈락자를 벼랑에서 떠밀지는 않는다. 한국은 자전거 페달을 더 이상 돌릴 수 없는 중산층, 근로빈곤층을 도울 묘안을 찾아야 한다. 미국에서 유럽으로 시선을 돌릴 때다.”
이영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