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포커스-김정욱] 과거에서 길을 묻다
입력 2013-01-27 19:44
2차 세계대전 후 미국 대통령들은 취임연설 서두에서 헌법과 민주주의 전통에 대한 경의를 표현해왔다. 유명 사학자 데이비드 레이놀즈에 의하면 가장 전통과는 상관없어 보이는 국가에서 200년간 투표로 선출한 왕을 위한 대관식을 지속한 것에 대한 자부심을 표현하는 것이다. 실제 미국의 대통령 취임의식이 유럽의 궁정의식에서 유래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레이놀즈가 굳이 왕과 대관식이란 표현을 써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영국을 제외한다면 그 어떤 오랜 역사를 가진 유럽 국가도 견줄 수 없는 미국 정치제도의 안정성일 것이다.
오랫동안 지속돼 온 국가 지도자 선출 전통의 원천은 헌법이다. 자연 헌법에 대한 자부심은 이를 만든 사람들의 신성화로 이어진다. 그러기에 대통령 취임연설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독립을 쟁취하고 자유와 민주주의를 기초로 한 국가를 만든 건국세대에 대한 언급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경제적 위기 상황에서 선출된 대통령들은 첫 취임연설에서 건국신화에 대해 적게 언급하는 경향이 있다. 가령 프랭클린 루스벨트나 로널드 레이건의 연설은 경제적 문제점을 진단하고 국민들이 듣고자 하는 구체적 해법을 제시하는 데 주력하고 있었다. 또 하나 이유를 든다면 건국 가치에 대한 당대의 이해가 대체적으로 이들 대통령이 추구하는 정책과 조응하지 않았던 점을 들 수 있다. 실례로 루스벨트는 취임사에서 투기자본과 공동체 정신과 배치되는 물욕을 공격했지만 오랫동안 경제적 개인주의는 자유라는 전통적 건국 가치에 의해 변호돼 온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레이건은 취임사에서 정부가 문제의 해결책이 아니라 문제 그 자체라고 주장하며 신자유주의 정책의 필요성을 강조했지만 이는 견제와 균형이라는 헌법 원리에 의해 만들어진 최초의 공화정부를 미국 민주주의의 상징으로 여겨온 오랜 자부심과는 배치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사뭇 달랐다. 그는 대공황 후 최악의 경기침체 상황에서 취임한 대통령이었지만 첫 번째에 이어 두 번째 취임연설에서도 건국세대에 대한 강한 믿음을 보여주었다. 독립선언서가 인간을 천부의 권리를 지닌 자유롭고 평등한 존재로 규정했고 ‘1776년의 애국자들’이 정치, 경제, 사회적 특권이 없는 민주주의를 추구한 사람들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신화일 뿐이다. 자유의 파수꾼들로 여겨진 건국의 지도자들 태반이 노예 소유주였고 대부분은 민주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들은 보통선거권에 부정적이었고 민중을 계몽의 대상으로 여겼을 뿐 이들의 대변인이 되겠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재산소유자가 보호받는 체제를 원했으며, 사회적 평등을 추구하는 당대의 사회 분위기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의 사고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 헌법이었다.
그럼에도 오바마의 취임연설은 자유와 평등이라는 미국의 건국 이상은 진리이나 스스로 실현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미국인들이 공유하는 건국신화가 차별받는 사람들에게 강력한 이념적 무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신화는 전승되는 것이 아니라 완성되어야만 하는 것임을 강조한 것이다. 그것은 경제적 약자를 돕고 성적 소수자에 대한 사회적 차별을 없애고 인종적 화합을 달성할 때 비로소 완수되는 것임을 분명히 한 것이다.
오바마는 건국신화를 완성하는 대통령으로 역사에 기억될 수 있을까? 그러기에 4년은 너무나 짧은 시간이다. 그러나 이것이 희망의 부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꿈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희망이 함께하기 때문이다.
이 글을 쓰면서 한 가지 질문을 던지게 된다. 우리는 사회정의가 실현될 수 있다는 희망을 끊임없이 불어넣어주고 이를 위한 개혁을 추동하고 이러한 개혁을 통해 완성될 수 있는 모두가 공유하는 신화를 가지고 있는가?
김정욱(고려대 연구교수·역사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