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안현미] 유구무언

입력 2013-01-27 18:37


TV 만화 ‘포켓몬스터’를 재밌게 보고 있던 아이가 책에 코를 박고 열중해 있는 나를 힐끔 쳐다보더니 물었다. “그 책은 무슨 내용인데요?” “…” “무슨 내용인데요?” “음… 책을 버리고 거리로 나가자는 제목의 책인데, 경마 이야기도 있고….” “도박 같은 거 말이죠?” “응.” “그럼 인생론 같은 거로군요.” 책에 코를 박고 책을 읽다가 그 말을 들었을 때 그야말로 유구무언일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미취학 아이가 내뱉은 말이니 말이다.

살다 보면 그렇게 입은 있으나 말을 할 수 없는 순간들이 종종 있기 마련이다. 작년 대비 책정 예산은 줄여놓고 사업의 효과는 예년보다 월등해야 한다고 요구하는 상사 앞에서도 그렇다. 예산이 줄었으니 사업의 효과도 줄어들 수밖에 없다.

예년 수준의 사업 효과를 원하신다면 예산을 깎지 말든가, 예산을 깎았으면 사업 실적 목표를 낮추는 게 합리적이지 않느냐 말씀드려본들 미운털이나 박히기 십상. 직장을 그만둘 게 아니라면 유구무언일 수밖에.

지난 2주간은 그런 요구에 맞는 사업운영계획안을 고민하고 대표 방침용 문서를 만들고 사업 효과를 극대화하는 방안에 대한 신규 아이디어를 쥐어짜고 요약본 프레젠테이션을 만드느라 스트레스가 엄청 심한 기간이었다. 해서 전업 시인으로 살고 있는 친구 K를 오랜만에 술집으로 불러냈다.

그런데 그 사이 K는 대학원 박사과정에 들어갔는데 얼마나 스트레스가 심한지 갑자기 원형탈모가 생겼다 한다. 너무 심각해 병원에도 꾸준히 다니고 있는데 원형탈모라는 또 다른 스트레스 때문에 우울증까지 올 것 같다 하니 그 앞에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을까.

돌아보면 주위에 스트레스 안 받고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니 누구나 자신만의 스트레스 관리법이 있어야 할 것이다. 내 경우에는 극도로 불안하거나 스트레스가 쌓이면 하고 있는 모든 일을 제쳐 놓고 책에 탐닉하는 편이다. 그러다 말이 필요 없는 문장을 만나면 수첩에 옮겨 적는다.

“내가 받는 이 모든 고통은 무슨 쓸모가 있습니까? 나는 고통을 이용해서 허영심을 채울 수 있는 시인도 아니거든요.” 에밀 시오랑의 ‘독설의 팡세’에서 읽은 문장이다. 그 문장을 재구성해서 K에게 보냈다. ‘네가 받는 그 모든 고통은 다 쓸모가 있다. 너는 그 고통을 이용해서 허영심도 꽃으로 만들 수 있는 시인이 아니냐’고.

안현미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