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맹경환] ‘甲甲한 사회’를 꿈꾼다

입력 2013-01-27 18:37


요즘 개그 프로그램에 등장할 정도로 유행하고 있는 말이 ‘갑을(甲乙)관계’다. 갑을이라는 말은 원래 10개의 천간(天干)과 12개의 지지(地支)를 조합한 육십갑자(甲子)에서 유래했다. 천간이 하늘, 지지는 땅과 관련된 것으로 천간·지지는 대자연의 기운과 흐름을 문자로 표현한 것이다. 얼핏 순서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갑론을박(甲論乙駁)’이나 ‘갑남을녀(甲男乙女)’에서처럼 갑과 을 사이에는 서열이 있는 것은 아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에 낫고 못함이 없듯이 말이다.

갑과 을은 갑을관계 속에서 상하관계가 돼 버렸다. 갑을관계는 계약서에서 계약 주체를 보통 ‘갑’과 ‘을’로 표현한 데서 유래했다. ‘갑’이 상대적으로 지위가 높은 계약자를 지칭하고 ‘을’은 상대적으로 지위가 낮은 계약자로 표현하면서 ‘갑을 관계’는 지위가 높은 자와 낮은 자 사이의 관계를 뜻하는 보통 명사로 쓰이고 있다.

돌아보면 역사는 갑과 을의 끊임없는 투쟁이었다. 가장 강력한 갑이었던 왕은 혁명 또는 시대의 흐름에 의해 끌어내려졌고, 군주제가 공화제로 나아가 민주주의로 발전하면서 갑을관계에도 다양한 변이가 생겼다.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돈은 곧 갑이었고, 노동을 제공하는 사람들은 자연스레 을이 됐다.

우리 사회는 비정상적인 갑과 을의 관계로 얽혀 있다. 큰 기업은 갑이고 작은 기업은 을이다. 같은 일을 하고도 절반의 임금만 받고, 언제 일자리를 잃을지 몰라 떨고 있는 비정규직이나 과도한 등록금으로 빚더미에 허우적대는 대학생들도 영원한 을이다. 화려한 영화와 드라마판에서 최저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돈을 벌기 위해 애쓰는 보조출연자와 스태프들, 시간당 4000원의 시급을 받으며 편의점과 주유소에서 밤샘 근무를 하는 청소년들…. 우리사회의 을은 일일이 열거하기도 힘들다.

지난 대선 과정에서 고통 받는 을의 마음을 헤아리는 각종 공약이 쏟아져 나왔다. 가장 부각된 갑을 관계는 재벌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관계였다. 비정상적인 갑과 을의 관계를 해소하는 게 곧 경제민주화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은 경제민주화 이슈를 선점하면서 국민의 마음을 얻었다. 그리고 약자 보호를 통해 국민행복 시대를 열겠다고 강조했다. 결국 우리사회 곳곳에 산재해 있는 갑과 을의 비정상적인 관계를 풀어보겠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출범 이후 경제민주화와 각종 복지 공약들이 뒤로 밀리는 것 아니냐는 비판도 나왔다. 이를 의식한 것인지는 몰라도 박 당선인은 지난 25일부터 시작된 인수위 분과별 업무보고에서 경제민주화 등 약자보호를 위한 공약들의 실천을 강조했다.

그래도 박 당선인이 을을 갑과 대등하게 만드는 ‘갑갑(甲甲)한’ 사회를 만들어낼 수 있을지는 솔직히 의문이 든다. 박 당선인과 그의 지지 세력들의 근본에는 이른바 갑이라고 하는 세력의 기득권 구조를 근본적으로 개혁하지 않고 서서히 개선해 나가겠다는 보수주의적 성향이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갑의 횡포에 을을 보호하겠다는 것이지 을을 갑의 지위까지 올려놓겠다는 뜻은 아

니다.

개인의 삶을 보더라도 박 당선인은 항상 갑의 입장에서 살아 왔다. 을의 입장은 항상 간접적으로 전해 들었을 뿐이다. 그나마 을의 입장을 전해들을 수 있는 소통의 창구도 제한돼 있다는 ‘불통’의 이미지가 너무 강하다. 박 당선인이 이러한 우려들을 불식시키고 대한민국을 진정 ‘갑갑한’ 국가로 만든 최초의 지도자가 될 수 있기를 희망해 본다.

맹경환 경제부 차장 khmae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