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현의 사막의 구도자들] 꿈

입력 2013-01-25 09:34
4세기 후반 교회의 교사였던 제롬(라틴어 이름은 히에로니무스)은 성경의 사람이기도 했지만, 키케로나 플로투스 등 고대 라틴 문학에 심취한 인물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라틴문학의 세련미에 비해 거칠고 조야한 성경의 문체에 적잖이 실망하곤 했다. 그런데 그가 안디옥에 머물던 중, 심한 열병에 걸리면서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된다. 그 자신의 회고담이다. “고대의 뱀(라틴문학을 뜻한다)이 이처럼 나를 농락하던 중 사순절 중반 경에 열병이, 진액이 빠진 내 육체의 골수 안으로 침투해 들어왔다. 열병은 나의 가련한 지체들을 태워 나는 겨우 뼈로만 겨우 지탱하는 정도였다. 사람들은 그 동안에 나의 장례를 준비했다…” 제롬은 열병으로 결국 자신의 심장이 멎었고 영혼이 심판받게 됐다고 쓴다.

‘제롬의 꿈’

“나는 영(靈)으로 기뻐하면서 심판하는 분의 법정으로 이끌려갔다… 너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에 나는 ‘기독교인’이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앉아있던 그 분은 ‘너는 거짓을 말하고 있다. 너는 키케로주의자다. 기독교인이 아니다. 네 보물이 있는 그곳에 네 마음도 있다(마 6:21)’고 말씀하셨다. 나는 침묵을 지켰다. 그 분은 나를 채찍질하라고 명했다. 나는 채찍질을 당하면서도 (라틴세속 문학을 더 좋아하는) 마음을 불태우는 열기 때문에 훨씬 더 고통스러웠다… 나는 이런 말로 맹세했다. ‘주님, 만약 내가 세속적인 문학작품을 소유하고 그것을 읽는다면 그것은 당신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맹세하고 나는 풀려나서 지상으로 다시 돌아왔다. 내가 눈물로 흠뻑 젖은 두 눈을 뜨자 모든 사람들이 놀랐다… 내 어깨는 온통 시퍼렇게 멍들어 있었고 나는 상처의 아픔을 느꼈다. 이후로 나는 그때까지 인간적인 책들에 대해 가졌던 만큼의 열정으로 거룩한 책(성경)을 읽었다.”

흔히 ‘제롬의 꿈’이라고 불리는 이 이야기가 순전히 꾸며낸 것이라고 말하는 학자들도 있다. 하지만 나는 제롬의 자전적 회고가 모종의 초월적인 경험에 근거해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는 이 경험 직후 비로소 사막으로 들어가 수도적 삶에 입문하고 열정적으로 히브리어 공부를 시작하기 때문이다. 히브리어를 배운 끝에 그는 일생동안 구약성경 전체를 히브리어에서 라틴어로 홀로 번역해 불가타(Vulgata) 라틴어 성경을 완성했으니 거룩한 책에 대한 이런 열정은 종교개혁 이전의 기독교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것이다. 그리고 ‘꿈’ 이후 장장 15년이 지나고서야 제롬은 다시금 라틴문학을 접하게 된다. 이런 정황을 종합하면 고대세계 최고의 성경 문헌학자 제롬이 탄생된 결정적인 계기가 그의 ‘꿈’이라고 보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물론 죽었다가 다시 깨어난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꿈’ 속에서의 경험이었을 것이다.



꿈을 신적 계시의 통로로 보는 관점은 신구약성경에서도 나타난다. 요셉의 해몽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지혜였고(창 41:25 이하), 동방박사들도 꿈을 꾸고 길을 인도받는다(마 2:12). 아예 환상이나 꿈을 문학적 틀로 한 에스겔서나 요한계시록 같은 묵시문학도 존재한다. 하지만 꿈이 계시의 통로가 된다는 고대의 관점은 프로이드 이후에 산산이 부서졌다. 프로이드는 1899년 ‘꿈의 해석’을 통해 꿈이 더 이상 신적인 불가사의한 것이 아니라 인과법칙에 의해 해석될 수 있는 것임을 설명했고 오늘날에 이런 입장은 일반상식이 됐다. 그런데 4세기 사막의 현자 에바그리오스는 인간의 마음과 꿈이 인과관계로 연결돼 있다는 점을 이미 간파했다. 에바그리오스의 글이다.

“때로 화(火)가 계속돼 화독(火毒)으로 변하면서, 밤에 통증이 생기거나 몸이 경련을 일으키거나 창백하게 되거나 독기 있는 야수의 공격을 받게 되는 일이 생긴다. 이런 네 가지 징후는 화독(火毒)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이런 징후에는 수많은 사념(邪念)이 붙어 있다.”

야수의 공격은 우리식으로 번안하면 ‘꿈자리가 사납다’ 정도가 될 것이다. 사나운 꿈자리나 통증, 경련, 몸이 창백하게 되는 것 등의 정신신체적 증상은 분노가 쌓여 마음의 독이 된 결과로 생겨나는 화병(火病)이다. 나에게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 시간강사시절 나는 방학 때만 되면 위염을 앓곤 했다. 의사의 처방전으로 약을 먹으면 그 때뿐, 곧 다시금 속쓰림을 겪었다. 아내는 개강해 강의를 시작하면 나을 터이니 약을 먹지 말라고 조언하곤 했다. 아내의 말대로 강의만 시작하면 속쓰림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라졌고 전임 교수가 된 뒤로 다시는 재발하지 않았다. 속쓰림은 사념(邪念) 때문에 생긴 화독(火毒)의 결과물이었던 것이다.

천사가 보내주는 특별한 표시

신경성 통증이나 경련 혹은 사나운 꿈자리 등의 치료는 마음에 달려 있다. 이런 증상은 사랑과 기도라는 기독교적 요법으로 치료 가능하다. 그러기에 에바그리오스에게는 통증이나 꿈조차도 마음 바탕을 고치라고 천사가 보내주는 특별한 표시였다. 제롬의 꿈이 성경번역으로 이끄는 놀라운 계시였다면 에바그리오스의 이론은 마음의 병을 치료하는 기독교적 심리요법이다.

<한영신학대 역사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