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열며-손영옥] 전직 장관 김병일처럼…

입력 2013-01-25 19:10


노년에 대한 독설의 역사는 길다. 기원전 6세기 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스 시인 밈네르모스는 침울한 어조로 젊음의 상실감과 노년의 지겨움을 노래했다. 현대에 와서 가장 회자되는 독설은 시몬느 드 보부아르의 것이다. 저서 ‘노년’에서다. “노인도 정말 인간인가?” 20세기 중반, 프랑스의 대표 지성 장 폴 샤르트르와의 계약결혼으로 제도에 맞서며 여성 운동을 이끌었던 페미니스트였지만, 노년에 대한 시각은 매몰찼다.

하지만 이제 나이가 사라진 ‘어모털족(族)’의 시대다. 미국 시사 주간 타임의 기자 캐서린 메이어가 만든 신조어다. ‘영원히 살 수 없는’이라는 뜻의 ‘모털(mortal)’ 앞에 부정을 의미하는 ‘어(a)’를 붙여 ‘영원히 늙지 않는’이라는 의미를 담아냈다. “나는 내가 늙었다고 생각하지 않아!” 이렇게 외치며 만년 청춘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는 것이다.

유명인사들 중에서 어모털족은 확인된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성인잡지 ‘플레이보이’ 창업주 휴 헤프너(87), 가임기가 끝난 여성은 주연이 될 수 없다는 할리우드 불문율을 깬 메릴 스트립(64), 12년 만에 새 앨범을 발표하고 제2의 전성기를 열고 있는 가수 최백호(63)…. 이런 사례는 주변에서 만날 때 더 반갑다. 얼마 전 인문서 ‘퇴계처럼’(글항아리)을 낸 김병일(68) 전 기획예산처 장관이 그런 사람이다. 책은 조선 중기 유학의 거두 퇴계 이황을 페미니스트로 조명했다. 관점이 독특해 많은 언론에서 다뤘다.

책에 더욱 관심이 갔던 건 저자의 정년퇴직 후 삶의 궤적을 우연치 않게 지켜볼 기회가 있었기 때문이다. 저자를 처음 만난 건 그가 예산처 장관을 지내던 2004년이었다. 당시 나는 경제부에서 예산처 출입기자로 일했다. 1년 정도의 장관직을 끝으로 그는 야인으로 돌아갔다. 30년 공직 생활도 막을 내렸다.

2009년 초, 몇몇 기자들과 김 전 장관과 식사할 자리가 있었다. 사학과 출신으로 역사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경북 안동의 도산서원선비문화수련원 일을 돕다가 덜컥 이사장까지 맡게 됐다고 전했다. 선비문화수련원은 교원 학생 공무원 등을 대상으로 선비 정신과 선비 문화를 배우고 체험케 하는 교육의 장이다.

그로부터 4년. 그 사이 출판담당 기자로 옮겨온 나는 신문사로 배달되는 신간을 통해 김 전 장관의 근황을 접하게 된 것이다. 저자가 된 그를 인터뷰하면서 이번 저술이 퇴계에 대한 공부와 깨달음이 차고 넘쳐 흘러나온 산물이라는 생각을 했다. “처음 선비문화수련원에서 퇴계에 대해 배우며 가장 감동했던 부분이 페미니스트적 면모였다. 그 감동을 수련원 수강생들에게 전했다. 그들 역시 고개를 끄덕이더라. 이런 공감을 더 많은 사람과 공유하고자 책을 내게 됐다.”

활기찬 노년은 어느 날 감이 뚝 떨어지듯 이뤄진 건 아니었다. 그는 행정고시에 통과한 후 ‘숫자’와 씨름하며 경제부처에서만 일했지만, 대학 전공인 역사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았다. 시간이 허락할 땐 역사 연구 모임을 만들었다. 퇴직 후엔 한국사 연구의 기본 언어인 한문을 익히기 위해 논어 맹자 등 사서를 배웠다. 아마추어 마라토너였던 그는 아내까지 끌어들여 부부 마라톤 모임을 만들었다.

현역시절에 놓치지 않았던 관심의 끈이 퇴직 후 자산이 됐고, 보험 들듯 챙긴 건강은 활력을 불어넣었을 것이다. 일을 놓는 순간, 갑자기 늙어버리는 사람들을 많이 봤다. 어모털족으로 살기란 생각보다 간단치 않다. 김 전 장관이 이뤄낸 인생 2막에 박수를 보낸다.

손영옥 문화생활부 선임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