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논단-배준호] 작은 정부의 큰 복지
입력 2013-01-24 18:41
서구의 근대 복지제도는 지난 130여년에 걸쳐 구축되었지만 발전유형은 나라마다 꽤 다르다. 우리는 1964년에 산재보험, 1977년에 국민건강보험을 도입하였으니 50년이 채 되지 않는다. 도입시의 모델은 제도별로 차이가 있지만 크게 보면 캐나다·미국·일본·영국(加美日英)의 유형이다. 이들은 작은 정부를 유지해 복지에서 국민의 자조노력과 자기책임을 강조하는 자유주의 유형으로 분류된다.
4개국에 비해 우리가 크게 뒤진 분야는 국민연금이다. 도입이 1988년으로 늦었고 가입대상도 전 국민을 포괄하지 못하고 있다. 이에 비해 의료와 건강보험, 산재보험과 고용보험 등은 덜 뒤져 있다. 이렇게 보면 논의 중인 기초연금은 시의성이 있으나 4대 중증질환 진료비 지원 건은 시의성과 적합성이 떨어진다고 할 수 있다.
연금정책은 백년대계로 한번 발을 떼면 거둬들이기 어렵다. 그래서 신중한 접근은 이 분야 종사자에게 암묵지다. 기초노령연금과 국민연금의 양축 체계는 생각보다 친(親) 중저소득자 방식이어서 기초연금으로 바뀌면 이들에게 개악으로 비쳐질 공산이 크다. 기초노령연금은 장래 지급대상을 좁히고 금액을 늘리면 기초연금보다 중저소득자 소득을 늘려줄 수 있다. 또 두 연금의 재원이 세금과 보험료로 달라 제도를 차별화하여 정책을 펼 수 있는 이점도 있다. 이에 비해 재원이 섞인 기초연금이라면 일본에서처럼 정책논의시 혼선이 유발될 수 있다.
그간의 작은 정부 정책은 박근혜 정부에서도 유지될 것이다. 유념할 점은 작은 정부에서도 크고 알찬 복지 실현이 가능하다는 사실이다. 세금과 보험료율, 공무원과 공공기관 종사자수를 늘리지 않고 복지수준을 넓히고 높일 수 있다. 노인장기요양보험과 보육 등의 서비스를 도입, 확대하면서 민간 주도로 추진해온 것이 대표적이다. 향후 수요가 늘어날 노인질환과 치매, 간병 문제도 유사한 방식으로 대응하는 것이다.
한정된 복지 재원은 당사자의 서비스 구입자금으로 지원하기보다 잠재적 당사자들이 서비스를 무료로 주고받을 수 있는 체계를 확립해 운영하는 기관의 지원예산으로 사용하면 큰 복지에 접근할 수 있다. 건강할 때 도움을 주고 거동이 불편할 때 도움을 받는 자원봉사저축(time bank, time credit)이 대표적이다. 1980년대 초 이후 활성화된 제도로 국내에서도 1982년의 선의은행 노력예탁구좌, 1998년의 부산시 복지자원봉사점수저축제, 1999년의 서울 동작구 자원봉사은행 등의 사례가 있다. 지금 26개국에서 활용되고 있으며 미국과 영국에 각 250개가 넘는 조직이 있다.
저성장으로 접어들면서 이사하는 이웃이 적고 큰 공사장이 줄었으며 대형상가에도 빈 가게가 늘고 있다. 5년이면 이웃의 절반이 바뀌던 시절은 옛 일이 되고 있다. 이제 지금 사는 마을과 집에 정을 붙이고 가꾸며 살아가야 하는 여느 선진국 같은 상황이 되었다. 월급과 소득이 늘지 않아 증세와 보험료율 인상 시도는 강한 저항에 부딪힐 수 있다. 그동안 세금을 덜 낸 의사 변호사 등의 전문직, 고소득 자영업자 등 기득권층에의 과세 강화나 불요불급한 예산 삭감을 통한 재원마련도 효과가 클지 불확실하다. 유력 대안은 국채발행을 통한 후세대로의 부담전가다. 하지만 후세대가 직면할 사회는 지금 이상의 저성장과 초고령사회로 근로인구도 적다.
이처럼 인구학적으로 보면 우리는 어느 나라보다 노후소득보장에서 자기책임과 자조노력을 강조해야 한다. 다행히 국민들이 유력 정치가와 전문가 그룹이 한통속이 되어 자조 노력없이 책임을 후세대로 떠넘기다 파국을 맞은 그리스 사태를 지켜보았다. 지금은 많은 재원이 드는 기초연금 못지않게 아니 그 이상으로 ‘노인자원봉사저축제’의 법제화 등 적은 재원으로 큰 복지를 실현할 수 있는 방안의 도입을 모색할 시점이 아닐까.
배준호 한신대 대학원장 경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