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길] 동화 속 왕자님 알고보니 떠돌이 구혼자… ‘백마 탄 왕자들은 왜 그렇게 떠돌아다닐까’

입력 2013-01-24 18:26


백마 탄 왕자들은 왜 그렇게 떠돌아다닐까/박신영/페이퍼로드

익숙한 것에 낯선 질문 던지기. 이 책은 쉬울 것 같으면서도 생각보다 간단치 않은 일을 해낸 결과물이다. 저자가 질문을 던진 대상은 누구든 어린 시절 푹 빠져 읽었을 법한 세계명작동화. ‘백설공주’ ‘잠자는 숲 속의 공주’ ‘소공자’ ‘소공녀’ ‘빨강머리 앤’….

계모 왕비의 계략으로 독이 든 사과를 먹었던 공주가 지나가던 왕자의 키스에 눈뜨고, 숲 속 높은 감옥에 갇힌 공주가 어느 왕자에 의해 구출될 때 어릴 적 우리는 박수를 보냈다. 그래서 자칫 빠지기 쉬운 ‘백마 탄 왕자’ 신드롬은 한때 여성학자들의 공격 대상이었다.

저자는 명작동화라는 텍스트를 또 다른 방법으로 읽는다. 서양 동화에 공주와 왕자는 왜 저렇게 흔하지? 백마 탄 왕자는 왜 저렇게 떠돌아다닐까? 한 나라의 왕자라는 사람이 저렇게 국경을 넘나들며 싸돌아다녀도 되는 걸까? ‘빨강머리 앤’ ‘홍당무’ ‘말괄량이 삐삐’ 등을 읽을 때는 또 이런 의문이 고개를 내민다. 서양 사람들은 왜 저렇게 빨강머리를 싫어하는 걸까.

문득 뇌리에 스친 이런 질문을 놓치지 않고 해답을 구한 작업은 책의 부제대로 명작동화에 숨은 역사 찾기였다. 바로 문학작품의 시대적 맥락을 찾아가는 일이었다.

서양 동화 속 왕자들이 떠돌아다니는 속내는 근대 이전의 유럽 역사에 담겨 있다. 중세 유럽에선 왕뿐 아니라 귀족이나 기사들도 지방 영주가 돼 각기 자신의 영토를 다스렸다. 신교와 구교 간의 종교전쟁인 ‘30년 전쟁’이 끝난 후인 1648년, 독일은 무려 300여 개나 되는 작은 나라들로 이뤄지게 된다.

이런 작은 나라에 후계자가 될 왕자가 많은 경우 문제가 생긴다. 영토를 분할해 상속하면 국력이 약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왕위를 계승하는 왕자를 제외한 나머지 왕자들은 스스로 자기 인생을 개척해야 했다. 성직자가 되는 등 다양한 방법이 있었다. 어떤 왕자는 남의 나라 왕국의 외동딸과 결혼해 왕국을 갖는 방법을 꿈꿨다. ‘백설공주’의 왕자는 결혼을 통해 신분 상승을 노렸던 중세 왕자들의 이야기에 다름 아닌 것이다. 역사가 폭로한 이런 반전이 책의 묘미다.

시대적 편견이나 인종·종족적 편견도 읽힌다. 빨강머리를 싫어했던 것은 이유가 있다. 게르만족의 후예인 서북부 유럽인들과 그들의 후손인 앵글로 아메리카 대륙 사람들이 게르만족이 가진 금발을 아름답고 정상적으로 본 반면, 자신들이 몰아낸 켈트족에게 흔한 빨강머리를 추하고 비정상적으로 본 것에서 출발한다.

이렇듯 저자는 자신이 읽었던 동화에 대해 다시 읽기를 시도한다. ‘왕자와 거지’ 이야기 속에서 유럽의 인클로저 운동을, ‘소공자’에서는 영국 귀족과 미국 상공인 사이에 얽히고설킨 적대감을 포착한다. 요즘 뜨는 뮤지컬 영화 ‘레미제라블’의 동명 소설에선 프랑스 혁명과 하수도의 역사를 풀어놓는다. 개인은 시대의 산물이며, 그런 개인들의 이야기를 담은 문학 역시 도도한 역사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걸 새삼 깨닫게 하는 책이다.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