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차인홍 (4) 인생을 바꾼 최고의 선물 ‘5000원짜리 바이올린’
입력 2013-01-24 18:47
재활원에는 텔레비전, 라디오가 없었고 클래식 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었다.
강민자 선생님의 바이올린 연주는 내가 처음 접한 ‘클래식 라이브 공연’이었다. 초보자용 바이올린으로 동요를 주로 연주하셨지만 나는 한동안 머릿속이 멍할 정도로 감동을 느꼈다. 손끝의 작은 움직임에도 미세하게 떨리는 소리에 완전히 마음을 빼앗겼다.
“저 가느다란 줄에서 어떻게 저리도 아름다운 소리가 퍼져 나올 수 있을까.”
바이올린을 향한 열정은 타오르기 시작했다.
“엄마, 나 바이올린 배우고 싶어. 다른 애들도 다 배운단 말이야.”
거짓말이었다. 재활원에서 바이올린을 배우는 어린이는 그리 많지 않았다. 5000원 정도 했던 초보자용 바이올린을 살 수 있는 형편이 돼야 배울 수 있었다. 재활원 아이들 중에도 비교적 집안 사정이 괜찮은 친구들이었다.
어머니는 반대했다. 어렵게 6남매의 생계를 이어가셨던 어머니로선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이 거절하셨을 것이다. 바이올린 수업을 하는 날이면 나는 교실 밖에서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만 있었다. 안에서 학생들이 켜는 바이올린 소리는 소음에 가까웠지만 레슨을 받는다는 것 자체가 그렇게 부러울 수 없었다.
바이올린 수업을 귀로만 6개월을 들었다. 부러움은 화로 바뀌었고 결국 폭발했다. 주말에 집에 돌아가면서 ‘오늘은 진짜 엄마한테 확실히 말해야지’라고 결심했다. 평소에 감정 표현을 잘 하지 않는 나로선 큰 용기를 낸 것이었다. 하지만 또 거절당했다. 나는 너무 억울해 떼굴떼굴 뒹굴며 난리를 쳤다. 부모님 가슴이 얼마나 아프셨을지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 나이가 아니었다. 나는 무조건 바이올린을 내 손에 넣어야 한다는 마음뿐이었다.
“나 바이올린 안 사주면 재활원에 다시는 안 나가. 제발 좀 사줘요, 엄마.”
집이 떠나가라 소리를 질렀다. 고개를 돌린 어머니는 한동안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잠시 정적이 흐른 뒤 어머니께서 코를 훌쩍하시면서 “알았으니까 이제 그만 울어”라고 말씀하셨다.
가슴 아픈 기억이다. 어머니는 두 발로 딛고 일어날 수 없는 막내아들의 부탁을 끝내 거절하지 못하셨다. 어머니가 빨래며 밥이며 온종일 고생해서 받으신 하숙비는 우리 6남매의 생활비였는데…. 그 사정을 헤아릴 턱이 없던 나는 단순히 바이올린을 배울 수 있다는 기쁨을 주체할 수 없었다.
시골의 장애인 시설에 있던 내가 나만의 바이올린을 갖고 연주법을 익힐 수 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집안 형편도 모르고 생떼를 쓰는 철없는 막내의 요구를 받아주신 어머니께 무한한 감사를 드린다. 무엇보다 하나님을 향한 감사함이 무의식적으로 자라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나를 계속 일으켜 세워주시고 바이올린이라는 큰 선물을 받도록 도와주신 누군가가 계시는구나.”
바이올린을 갖게 된 뒤 나는 1주일에 한 번 찾아오시는 강 선생님을 애타게 기다렸다. 선생님은 연습곡을 여러 차례 반복하는 것을 숙제로 내셨다. 나는 셀 수 없이 연습했다. 멜로디가 귀에 박히도록 반복해 연습했고 다음에 연습할 부분까지 미리 연습했다.
운지법이 손에 익지 않아 거슬리는 소리가 났지만 나는 그렇게 즐거울 수 없었다. 악보대도 없이 차가운 마룻바닥에 앉아 두세 시간 연습하는 일이 지겹지 않았다. 연습하지 않는 시간에도 바이올린의 매끈한 몸통을 쓰다듬으면서 마냥 행복해했다.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연습에 매달리다 보니 줄이 끊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갈아 끼울 줄이 없으면 끊어진 줄을 이어 연습을 계속했다.
정리=김경택 기자 ptyx@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