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묵화로 거듭난 고택의 품격… 설경이 황홀한 강릉 선교장 ‘스페셜 올림픽’ 문화행사 무대로
입력 2013-01-23 18:21
밤새 소복소복 내린 눈으로 강릉 선교장이 한 폭의 수묵화로 거듭났다. 열화당을 비롯한 123칸 고택의 지붕은 눈 속에 파묻혀 용마루의 실루엣만 희미하다. 선교장을 둘러싼 유려한 곡선의 담장과 줄행랑의 굴뚝도 눈을 흠뻑 뒤집어쓴 채 흑백의 조화를 연출하고 있다. 수백 그루의 노송은 눈 무게를 이기지 못해 가지를 늘어뜨리고, 300년 선교장 역사를 지켜본 배롱나무는 목화처럼 탐스런 눈꽃을 주렁주렁 달고 있다.
강원도 강릉 선교장은 설경이 황홀한 고택이다. 한 번 내렸다 하면 눈이 무릎 깊이로 쌓이는 영동지방의 기상 때문만은 아니다. 123칸이나 되는 고택의 웅자(雄姿)와 선교장을 둘러싼 노송들의 고고한 자태 때문은 더더욱 아니다. 선교장의 설경이 매혹적인 까닭은 고드름을 타고 방울방울 떨어지는 활래정의 눈 녹은 낙숫물이 얼어붙은 연못에서 청아한 목소리로 시를 읊기 때문이다.
오죽헌과 경포대 중간쯤 위치한 선교장은 세종대왕의 둘째 형인 효령대군의 11대손 이내번(1708∼1781)이 300년 전에 터를 잡은 이래 후손들이 100년에 걸쳐 증축했다. 조선시대에 궁궐이 아닌 민가로서 가장 크게 지을 수 있는 집의 규모는 99칸.
그러나 예외 없는 원칙은 없는 법이어서 선교장은 102칸이었다. 안채, 사랑채, 동별당, 서별당, 행랑채, 사당, 활래정에 하인의 집까지 더하면 300칸에 이를 정도로 웅장한 규모였지만 지금은 123칸만 전해온다.
경포호수가 지금보다 훨씬 넓었을 때 집 앞에서 배를 타고 건너다녔다고 해서 배다리집으로도 불리는 선교장(船橋莊)에 들어서면 맨 먼저 연못 위의 정자 활래정이 반긴다. 활래정은 선교장의 주인이 기거하던 공간으로, 얼어붙은 연못에서 목이 꺾인 채 마른 줄기로 서 있는 홍련이 시심을 돋운다. 활래정(活來亭)은 주자의 시 ‘위유원두활수래(爲有源頭活水來)’에서 집자한 것으로 ‘맑은 물은 근원으로부터 끊임없이 흐르는 물이 있기 때문’이라는 의미이다.
강릉 안인진리의 해변에서 염전을 일구고 소금을 팔아 부를 축적한 이내번은 영동 일대를 개간해 대농장을 만들어 농민들에게 제공했다. 남쪽으로는 삼척과 동해, 북쪽으로는 속초와 양양, 서쪽으로는 횡성과 평창까지 선교장의 농토였다고 한다. 추수한 곡식을 보관하던 창고가 영동 일대에 다섯 군데나 있었다고 하니 조선 최고의 만석지기 부자였던 셈이다. 여느 고택과 달리 집 이름에 ‘당(堂)’이나 ‘각(閣)’ 대신 ‘장(莊)’을 붙인 것도 독립영지를 가진 유럽의 귀족처럼 자급자족 경제시스템을 갖춘 장원(莊園)을 형성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교장의 주인들은 단순히 부를 축적만 한 것이 아니라 경북 경주 최부잣집처럼 나눔과 상생의 삶을 추구해 농민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1894년 갑오농민전쟁 때 선교장을 공격한 농민군을 물리친 세력이 선교장을 중심으로 경제권을 형성한 소농들이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대를 이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선교장은 이탈리아의 메디치가(家)에 비견된다.
집에도 인격이 있다는 말은 선교장을 두고 하는 말이다. 선교장의 대문은 의외로 너비가 2m 남짓으로 작은 편에 속한다. 해가 지고 달이 뜬 밤에 하루 묵고 갈 거처를 찾는 나그네가 으리으리한 저택을 보고 발길을 돌릴까봐 일부러 대문을 작게 만들었다고 한다. 집 주인의 성품을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선교장의 넉넉한 인심은 자연스럽게 전국의 시인묵객들을 불러 모아 풍류문화의 산실로 자리 잡게 했다. 인근에 경포대와 경포호가 있을 뿐 아니라 지리적으로 금강산 가는 길목에 위치해 시인묵객들은 선교장에 머물며 주인으로부터 온갖 편의를 제공받았다. 순조 때 영의정을 지낸 조인영을 비롯해 추사 김정희의 글이 선교장에 보관된 것도 이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때는 김구 선생이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선교장을 찾았고, 여운형은 선교장에 위치한 강원도 최초의 사립학교인 동진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기도 했다. 몇 년 전 평창동계올림픽 개최지 선정을 위해 내한한 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들의 다회가 열린 곳도 선교장이다. 이 뿐만이 아니다. 집 곳곳에서 예스러움이 묻어나는 선교장은 영화나 드라마의 무대로도 인기가 높아 영화 ‘식객’을 비롯해 드라마 ‘황진이’ ‘궁’ ‘공주의 남자’ 등이 이곳에서 촬영됐다.
선교장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건물은 솟을대문을 중심으로 담처럼 길게 늘어선 23칸 크기의 행랑채. 하인을 비롯해 지나던 선비와 풍류객들이 머무는 공간인 행랑채는 주인이 부르면 하인이 뛰어가야 할 정도로 길다. 그래서 도망을 뜻하는 줄행랑이 행랑채에서 비롯됐다는 말도 전해온다. 일직선으로 늘어선 3개의 협문은 동쪽 끝에서 보면 원근감이 극도로 부각돼 사진작가들이 많이 찾는다.
날렵한 처마에 매달린 고드름이 일품인 열화당(悅話堂)은 선교장 주인이 거처하던 사랑채. ‘세상과 더불어 나를 잊자. 어찌 다시 벼슬을 구할 것인가. 친척들의 정다운 이야기에 기뻐하고 거문고와 책을 즐기며 우수를 쓸어버리자’는 도연명의 ‘귀거래사’ 중 열친척지정화(悅親戚之情話)에서 이름을 따왔다. 후손이 운영하는 출판사 열화당의 이름도 이곳에서 유래됐다. 현재 작은 도서관으로 이용되고 있는 열화당 앞의 테라스는 구한말에 러시아공사관에서 선물로 지어준 것.
선교장은 건축물 자체로서도 운치가 있지만 선교장을 반원형으로 둘러싼 나지막한 산의 소나무 숲과 어우러져야 제멋이다. 보호수로 지정된 500∼600년생 노송 16그루를 비롯한 수백 그루의 소나무는 천연기념물 지정을 기다리고 있는 금강송들.
거북등을 연상시키는 거대한 줄기가 용틀임을 하고 우산 모양의 가지에 눈이 쌓인 금강송은 겸재 정선의 산수화에나 나옴직한 품격 있는 나무들이다. 그리고 그 금강송 아래로 유려한 곡선의 담이 선교장의 설경을 더욱 품격 있게 만든다.
강릉=글·사진 박강섭 관광전문기자 ks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