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열며-정철훈] 모든 138번째 문학인

입력 2013-01-23 18:38


올 초 출간된 시인 고은의 1970년대 일기 ‘바람의 사상’엔 이런 대목이 있다. “밤에 황석영의 소설 하나를 읽었다. 그놈 기막힌 놈이다.”(1973년 11월 18일)

당시 고은은 마흔 살, 황석영은 서른 살로 열 살 터울이지만 ‘놈’이란 호칭은 비하의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황석영의 문학적 재능과 ‘황구라’로 통했던 그의 걸쭉한 입담에 혀를 내두르는 감탄사에 가깝다고 할 것이다. 시인 김지하에 대한 언급도 있다. “지하와 따로 나주집 구석방에서 만났다. (중략) 지하는 헤어질 때 마치 다시 못 만날 것처럼 비장한 뒷모습이 된다. 지하는 청년이 아니라 노인 같다. 시대의 짐이 무거운 것이다.”(1975년 3월 11일)

김지하는 황석영에 비해 겨우 두 살 위였지만 어딘지 모르게 비장미를 풍겼던 터라 겉늙어보였던 것이다. 흔히 1970년대 문학에서 “시는 김지하의 ‘오적’(1970)에서, 소설은 황석영의 ‘객지’(1971)에서 비롯된다”라는 말이 있듯, 두 사람은 1970년대가 낳은 문학적 풍운아였다. 유신시대에 김지하가 감옥에서 쓴 이른바 ‘지하의 선언’을 읽은 소회를 고은은 이렇게 일갈한다. “지하! 이 어린놈이 죽음 다음의 무서움을 이겨내고 있다. 그렇다. 우리는 곧 만나게 될 것이다.”(1975년 9월 14일)

그로부터 어언 40년이 지난 오늘, 우리는 지난 18대 대통령 선거 당시 각각 ‘정권 교체’와 ‘박근혜 후보 지지’로 엇갈린 두 사람의 서로 다른 입장을 목도하게 된다. 얼핏 황석영은 패배자의 편으로, 김지하는 승리자의 편으로 분류되지만, 실상 문학 판에서 승자는 거의 보이지 않고 패배의 심연은 깊고도 검다. 게다가 패배의 심연에 빠진 것도 억울할 텐데 자칫 집단적 전과자가 될 처지에 놓인 문인들이 있으니, 지난해 12월 14일 한 일간지에 ‘우리는 정권교체를 원합니다’라는 제목의 선언문을 광고로 실은 젊은 문인 137명이 그들이다.

서울시선거관리위원회는 이 광고가 공직선거법 제93조(탈법 방법에 의한 문서·도화의 배부·게시 등 금지) 제1항을 위반했다며 이들을 검찰에 고발했다. 이 조항에 따르면 선거 180일 전부터 선거일까지 정당 또는 후보자를 지지·추천하거나 반대하는 내용을 담은 광고를 게재하는 것은 불법이다. 혐의가 인정되면 2년 이하의 징역이나 400만원 이하의 벌금을 내게 된다.

이제 공은 검찰로 넘어간 상태다. 하지만 지금은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의 국정철학인 ‘국민 대통합’을 거론할 것도 없이 ‘선거 후유증 최소화’에 대해 고민해야 할 때다. 융통성을 발휘하지 않으면 자칫 박근혜 당선인의 집권 기간 내내 문인들과 불화하는 한랭전선이 형성될 우려가 없지 않다. 이들 137명은 지난 18일 낸 성명서에서 “만일 이 시대의 절망과 고통을 나누고 좀 더 나은 세상을 원하는 것이, 나아가 그 염원을 공표하는 것이 위법적 행위가 된다면 그것의 가장 확실한 증거물은 우리의 시와 소설일 것”이라며 오히려 시와 소설을 증거물로 삼으라고 한목소리를 낸 게 그 단초일 수 있다.

눈에 띄는 것은 성명서 끝부분에 적힌 ‘모든 138번째 문학인의 이름으로’라는 문구이다. 어찌 보면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를 지지한 48%가 138번째 문학인에 준하는 심정적 동조자일진대, 승리자 측은 이 패배의 심연을 더 깊게 파서 이들의 패배를 또다시 각인시킬 필요가 있는 것인지 숙고할 필요가 있다.

고은은 일기에 썼다. “인간의 퇴보가 정치의 갈등으로 증명되는 것이 아닌가. 정치는 인간을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내게 하는 폭력이다. 아, 아, 아, 왜 인류는 정치하는 것으로 이어져 오고 있을까.”(1975년 8월 16일)

갓 마흔 나이에 정치와 문학의 가역 반응에 대해 일갈한 고은의 예지력은 놀랍다. 아니, 고은 일기야말로 문인과 정치권력이 충돌하던 유신시대에 한 순수 시인이 어떻게 참여 시인으로 변해가는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오늘의 승리자들은 참고할 만하다.

정철훈 문학전문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