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이명희] 그레이 스완
입력 2013-01-23 18:38
고대 로마의 풍자 시인 유베날리스는 “착한 사람은 검은 백조처럼 드물다”고 했다. 모든 백조는 하얀 깃털을 갖고 있다고 믿었기에 예로부터 블랙 스완(Black Swan·흑조)은 상상 속에나 있는 존재였다. 근대 유럽에서는 있을 수 없는, 거의 불가능한 일을 표현할 때 이 말이 쓰였다고 한다. 그러다 1697년 네덜란드 탐험대가 호주에서 검은 백조를 발견한 뒤부터는 존재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졌지만 실제로는 존재하는 것을 뜻하는 말이 됐다.
차이콥스키가 1876년 작곡해 그 이듬해 볼쇼이 극장에서 초연한 발레 ‘백조의 호수’에도 왕자를 유혹하는 요염한 흑조가 등장한다. 순수한 백조와 달리 흑조는 사악함을 상징한다.
레바논 출신의 금융전문가 나심 니콜라스 탈렙은 저서 ‘우연에 속지 마라(Fooled by Randomness, 2004)’에서 처음 블랙 스완 이론을 내세웠다. 인간에게는 시장의 앞날을 예측하는 능력이 없고, 과거에 결코 발생한 적 없는 사건이 미래의 어느 순간엔가 반드시 벌어진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블랙 스완은 모두 백조라고 알고 있던 믿음이 무너졌을 때처럼 예측하기 어렵고, 일단 발생하면 충격이 큰 사건을 말한다.
탈렙은 2007년 펴낸 ‘블랙 스완’에서 2001년 미국의 9·11 테러사건, 구글의 성공, 1차 세계대전, 소비에트연방(소련) 해체 등을 그 예로 들었다. 그러면서 “앞으로 상상할 수 없는 최악의 파국이 월가를 덮칠 것”이라고 경고했고, 이듬해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터져 유명세를 탔다.
블랙 스완에서 파생된 말이 그레이 스완(Gray Swan·회색 백조)이다. 이미 시장에 알려져 있어 상대적으로 충격이 크지 않지만 지속적으로 악영향을 주는 상황을 말한다. 블랙 스완과 상반되는 화이트 스완(White Swan·백조)은 누리엘 루비니 미국 뉴욕대 교수가 저서 ‘위기경제학(2010)’에서 처음 사용한 말로 역사적으로 되풀이되는 금융위기를 가리킨다. 금융위기는 충분히 예측 가능하며 예방도 할 수 있는데, 제 시기에 적절한 대응책을 마련하지 못해 닥친다는 게 그의 진단이다.
박재완 기획재정부 장관이 그제 위기관리대책회의에서 “최근 경기회복과 관련한 긍정적인 신호가 나타나고 있다”며 현재 경제상황을 블랙 스완 이후의 그레이 스완에 비유했다. 김중수 한국은행 총재도 같은 날 “이젠 (세계 경제가 개선되는 방향으로) 한 발짝 나갔다”고 긍정적 진단을 내놨다. 올해는 경제 수장들의 진단대로 경기가 좀 나아졌으면 좋겠다.
이명희 논설위원 mhee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