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변협회장 당선된 위철환 변호사] “배움·정의에 대한 갈증이 나를 만들어”

입력 2013-01-22 19:14


‘보통 변호사.’ 21일 47대 대한변호사협회장에 당선된 위철환(55·사법연수원 18기) 변호사가 내건 캐치프레이즈였다. 화려한 이력을 가진 엘리트 후보들과 다른, 지극히 평범한 변호사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22일 서울 서초동 법원건물 맞은편 후보자 캠프 사무실에서 위 변호사를 만났다. 위 변호사의 이력은 ‘보통’의 그것이 아니었다. 소년 시절 신문배달과 구두닦이를 전전했고, 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다. 그러다 야간 법대를 졸업해 변호사가 됐다. 그리고 1만2000여명의 변호사를 회원으로 둔 국내 최대 변호사 단체의 수장이 됐다. 그의 삶은 평범하지 않은 이력들로 빼곡히 채워져 있었다.

◇두 번의 ‘야간’ 이력=위 변호사의 이력에는 ‘야간’이 두 번 등장한다. 위 변호사는 1974년 고교 입시에서 낙방했다. 전남 장흥 출신의 소년은 무작정 서울로 상경했다. 그는 “촌에서는 아무래도 먹고 살 길이 막막했었다”고 회고했다. 서울의 친척집을 전전하며 신문배달·구두닦이 등 닥치는 대로 일했지만, 세상은 녹록지 않았다.

“끼니를 해결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죠. 골목길을 걷다가 슬레이트 지붕 위에 널어놓은 누룽지를 주워 먹기도 했습니다. 그땐 고등학교에 다니는 또래들이 그렇게 부러워 보일 수가 없었습니다.” 2년의 방황 후 그는 중동고 야간에 들어갔다. 2살 어린 동생들과 함께 고등학교를 다닌 그의 손에는 서울교대 합격증이 쥐어져 있었다. 그는 1981년부터 6년가량 서울의 한 초등학교에서 ‘위 선생님’ 생활을 했다.

“처음 교편을 잡았을 때 ‘정말 기쁘다’는 말 외에는 표현할 방법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갈증을 느꼈다. 그는 “사회적으로 혼란스러운 시기였고, 좀 더 적극적으로 사회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찾고 싶었다”고 했다. 그는 다시 한 번 야간의 길을 택했다. 위 변호사는 성균관대 법대 야간학부에 지원했다. 낮에는 선생님으로, 밤에는 고시생으로 살았다. 1984년 법대 졸업 후 2년의 ‘주경야독’ 끝에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마침내 변호사가 된 그가 단독 변호사로 개업했다. 의뢰인들은 늘 “판사 하다 나왔냐? 검사 하다 나왔냐?”고 물었다. 변호사를 하면서 악습이나 관행을 따르지 않겠다고 각오했지만 쉽지 않았다. 위 변호사는 “방향만 옳다면 의지의 문제라고 생각했는데 순진했었다”며 “판·검사 출신이 아닌 개인 변호사가 사건을 수임하기도 해결하기도 쉽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십여 년 전, 수원 법조비리로 변호사들이 대거 징계, 실형을 받는 모습을 지켜보며 자신의 선택에 확신을 갖기 시작했다.

그는 얼마 후 18대 경기중앙변호사회장에 출마해 쟁쟁한 전관 변호사들을 제치고 당선됐다. 위 변호사는 “그때 일선 변호사들 사이에서 변화의 바람을 느꼈다”고 했다.

◇소통하는 ‘보통 변호사’=위 변호사는 변협이 ‘사익집단’으로 전락했다는 지적에 동감하며 변협의 공익성 강화에 중점을 두겠다고 했다. 위 변호사는 “형사사건은 국선 변호를 많이 하고 있는데, 민사사건에서도 그런 법률구조활동을 활성화하겠다”고 밝혔다. 이어 “변호사들이 소송을 저렴한 가격에 수용하도록 하고, 실비 정도만 지원해주는 방안을 모색 중”이라며 “민사사건도 국민들이 제대로 변호인 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경기지방변호사회장 시절 수원역, 경기도청, 수원시청 등에 마련했던 무료 법률상담실 서비스도 변협 차원의 전국적인 규모로 늘려 나가겠다고 덧붙였다.

위 변호사는 “현재 법률수요에 비해 변호사 공급이 너무 많은데, 공직진출 확대 등을 통해 일자리를 늘리겠다”고 공언했다. 구체적으로는 입법보좌관, 사법보좌관 등을 확대하고, 기업체 내부의 준법감시인 범위를 넓히는 방안을 제시했다.

정현수 기자 jukebox@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