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美에 밀린 佛, 말리 개입으로 ‘阿영향력’ 되찾기… 프랑스-아프리카 관계의 역사
입력 2013-01-22 21:38
“아프리카 없이는 21세기 프랑스 역사는 없었을 것이다.” (프랑수아 미테랑 전 프랑스 대통령)
“아프리카는 외교·경제·문화적 측면에서 프랑스의 국제적 위상을 높여주는 진정한 기회의 땅이다.” (도미니크 드 빌팽 전 프랑스 외무부 장관)
‘검은 대륙’ 아프리카에서 갖는 프랑스의 지위는 특권적이고 독점적이다. 아프리카에서 프랑스어 사용 인구만 1억 명에 달하는 데다 1960년대 탈식민지화 시대를 거치고서도 관계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프랑스는 식민 제국주의 이미지 대신 쌍방향 협력 관계를 강조하는 한편 경제, 안보 이득을 취하는 쪽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한동안 미국과 중국의 견제 속에 아프리카에서 멀어진 프랑스는 최근 말리 사태 개입으로 다시 한 번 위용을 과시하고 있다. 그러나 신(新) 식민주의라는 비판도 끊이지 않는다.
◇프랑스와 아프리카, 프랑사프리크(Francafrique)=“‘프랑사프리크’의 사망 확인서에 사인하고 싶은 심정이다.”
2008년 장 마리 보켈 국무장관은 공개적으로 이렇게 밝혔다. 이제까지의 아프리카-프랑스 관계를 변화시키겠다는 의미였다. 그가 언급한 ‘프랑사프리크’는 프랑스와 아프리카의 합성어로 중층적 의미를 지닌다. 표면적으로는 프랑스와 아프리카의 긴밀한 관계를 뜻하지만, 프랑스 지도층이 아프리카 정권을 정치적으로 보호해 주고 반대급부로 경제적 이익을 확대하는 것을 비꼬는 말이다.
2006년까지 아프리카에 수출을 가장 많이 하는 나라는 프랑스였다. 경제인들의 영향력은 지금도 막강하다. 아프리카에서 사업을 하는 프랑스 기업인 및 투자자들의 모임 아프리카투자자협의회(CIAN)는 아프리카 49개국, 1000여 곳에 지사를 두고 있고 산업 정보를 전문적으로 수집하는 국제무역고문(CCE) 2000여명도 아프리카에서 활동 중이다.
영향력만큼 프랑스 정치인들의 아프리카발(發) 부패사건도 끊이지 않았다. 미테랑(1981∼95년) 전 대통령의 재임 시절인 1993∼94년 프랑스 고위층이 앙골라의 불법 무기 거래에 영향력을 행사해 자크 아탈리 전 유럽부흥개발은행(EBRD) 총재 등 42명이 재판에 회부된 ‘앙골라 게이트’가 대표적 사건이다. 미테랑 전 대통령의 아들 장 크리스토퍼도 이 사건으로 구속됐다.
‘프랑사프리크’ 정책의 시작은 샤를 드골(1958∼69년) 전 대통령 때였다. 드골 대통령은 알제리 등 잇따른 아프리카 국가들의 독립 요구에 직면했다. 그는 일단 식민지를 독립시킨 뒤 자국의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한 협력 정책을 강화키로 했다. 드골 대통령은 식민 국가들이 독립할 때 비밀방위협정을 맺어 전략적 자원의 접근 권한을 우선 확보했고, 프랑스군의 역내 주둔 및 군사 지원을 합법화했다. 프랑스는 현재도 아프리카 8개국과 방위협정을 체결 중이며 약 1만 명의 프랑스 특수부대가 차드, 중앙아프리카공화국, 가봉, 세네갈 등지에 주둔하고 있다.
공적개발원조(ODA)의 시작도 드골 대통령 때였다. 현재 세계 제2위 아프리카 원조 공여국인 프랑스의 개발원조금은 1960년대부터 90년대까지 8배 이상 증가했다. ‘아프리카 셀’은 지금까지도 베일에 싸인 비밀 기관이다. 아프리카에 관련된 모든 정보를 대통령에게 자문하는 직속기관인 아프리카 셀은 오랜 기간 아프리카에 군사 개입을 시도했다. 아프리카 셀은 정상적 외교 채널인 외무부를 제쳐놓고 대통령에게 직보(直報)하며 아프리카 외교 권력의 중심으로 활동했다.
◇신 식민주의와 아프리카의 경찰=드골 대통령이 아프리카 협력 관계의 기조를 다졌다면 냉각기는 니콜라 사르코지(2007∼12년) 전 대통령 때 시작됐다. 사르코지 대통령은 2007년 대선 유세 당시에도 아프리카와 관계를 끊겠다는 듯한 발언을 해 논란의 중심에 섰고, 집권 이후에도 그가 한 연설이 아프리카인들의 심기를 불편케 했다. 그는 또 아프리카인들의 이주 억제, 불법 이민자 강제 송환 등 강력한 정책을 사용하기도 했다.
이런 영향 등으로 아프리카에서 프랑스의 인기는 떨어져갔다. 압둘레이 웨이드 세네갈 대통령처럼 프랑스 대신 미국과 친해지려고 외교 노선을 전환하거나 로랑 그바그보 전 코트디부아르 대통령처럼 프랑스와 거리를 두는 지도자들도 생겼다.
사르코지의 명분은 이것이었다. 경제적 이득을 대가로 아프리카 옛 식민 국가 독재자들을 후원하면서 그들의 부패와 족벌주의 등을 문제 삼지 않는다는 비판을 들었던 프랑스가 이제 새로운 관계를 수립할 때라는 논리였다. 그는 ‘아프리카인(人) 자크’라고 불리길 좋아했던 전 시라크 대통령과 차별화된 정책을 구사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아프리카의 경찰’ 역할이 정치적으로 부담스러운 데다 아프리카에서 얻는 이득이 점차 떨어지는 것도 이유로 작용했다.
프랑스가 멀어진 자리에 미국과 중국은 빠르게 진입했다. 경제적으로는 중국이, 군사 및 외교 분야에서는 미국이 아프리카와 가까워졌다. 프랑스의 대아프리카 수출물량은 중국 미국에 이어 3위로 밀려났다.
프랑스는 최근 2∼3년 사이 다시 한 번 변신을 시도하고 있다. 코트디부아르 리비아 말리 등 아프리카 분쟁에 잇따라 개입한 것이다. 2011년 프랑스는 리비아에서 ‘오디세이 작전’을 펼쳤고, 같은 해 코트디부아르에서 그바브보 대통령을 축출하는 데도 선두적인 역할을 했다. 최근 말리 파병 결정은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이 한동안 부담스러워했던 아프리카의 경찰 역할을 확실히 받아들인 것 아니냐는 분석이다. 그러나 말리 군사 개입이 잘못된 선택으로 끝날 경우 신(新) 식민주의를 시도했다는 비난을 면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박유리 기자 nopimul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