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차인홍 (2) 초등학교에 입학조차 못하고 이듬해 재활원으로
입력 2013-01-22 19:03
혼자서 집밖으로 나갈 수 없던 나는 초등학교에 입학할 수 없었다.
또래 친구들이 다 가는 학교에 가지 못한다는 불안감과 외로움은 이제 와서도 말로 설명하기 어렵다. 만약 아버지나 어머니 중 한 분이 나를 전적으로 돌봐줄 여유가 있으셨다면 학교에 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늘 편찮으셨고 어머니는 생계를 이어가야 했기 때문에 1965년 초등학교 입학나이였던 여덟 살이 된 나는 주로 방안에만 머물렀다.
나는 그 다음해 ‘성세재활원’이라는 장애인 시설에 맡겨졌다. 어려운 살림을 꾸려나가야 하는 와중에도 부모님은 “최소한의 교육은 시켜야 한다”는 의무감에 안간힘을 쓰셨다. 그러나 ‘나도 다른 친구들처럼 학교에 다닌다’는 설렘보다는 부모님 곁을 떠나야 한다는 두려움이 컸다.
성세재활원은 남대전성결교회 장로이자 의사였던 고(故) 남시균 이사장의 헌신으로 세워졌다. 처음에는 몇몇 어린이를 돌보는 정도였으나 남 이사장께서 나중에 사재를 털어 재활원으로 규모가 커졌다. 120여명의 어린이들이 생활했지만 재정이 넉넉지 않았다. 정부 보조금만으로는 운영비도 제대로 충당하지 못할 정도였다. 재활원에는 나처럼 몸이 불편한 친구들과 고아들이 함께 생활했다. 돌이켜보면 재활원에서의 가난함은 견디기 어려울 정도였지만 교육을 받고 친구들과 어울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에 감사함을 느낀다. 특히 추운 겨울에는 대부분이 동상에 걸린 발을 밤새 긁으며 잠을 설치곤 했다. 40여명이 서로 살을 부비며 추위를 이겨내야 했다. 주로 강냉이 죽이나 국수로 끼니를 때웠기 때문에 한 친구는 영양실조로 쓰러지기까지 했다.
지금도 허허벌판에 덩그러니 세워진 재활원에 맡겨졌던 첫날이 생생하다. 깊은 밤 무서움을 달래주는 것은 개구리 울음소리밖에 없었다. 창문으로 스며드는 달빛이 그윽했지만 그럴수록 외로움은 더 커졌다. 눈물을 삼키고 또 삼키며 지새운 날은 손으로 꼽을 수조차 없다. 너무 일찍 겪은 두려움은 혼자 감당할 수 없는 크기였다.
‘아, 나 혼자 남았구나!’
내 유일한 낙은 집으로 돌아가 가족들을 만날 수 있는 방학을 기다리는 것. 방학이 끝나고 재활원으로 돌아가야 할 때면 눈물을 쏟으면서 엄마에게 떼를 썼다. 멀리서 재활원 건물만 보여도 나는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어머니는 매번 눈물을 훔치시며 나를 떼어놓고는 무거운 발걸음을 돌리셔야 했다.
시간이 약이었다. 차츰 적응이 됐다. 친구들과 장난을 치고 놀 수 있을 정도가 됐다.
그리고 한참 지난 뒤에야 무서움에 몸서리쳤던 나를 달래주시는 하나님께서 그 컴컴한 밤에도 함께 계셨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무엇보다 성경에서 그때 나의 상황과 겹쳐지는 대목을 찾아 읽고선 뜨거운 눈물을 삼켰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시편 23편 1∼4절)
괴로운 시절의 기억과 주 안에서 평온했던 다윗의 노래가 어떻게 같은 감정일 수 있느냐고 반문할 수 있다. 그러나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가 내 삶에서 가장 어두웠던 어린 시절이었고 그런 절망에 빠진 나를 ‘쉴 만한 물가가 있는 풀밭’으로 이끌어주신 존재가 바로 주님이라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나는 어린 양이었고 목자이신 하나님이 나를 곁에서 지켜보고 계셨다는 것을.
정리=김경택 기자 ptyx@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