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개천서 龍나는 역동적 사회”… 한영우 교수 출간 ‘과거, 출세의 사다리’서 급제자 분석

입력 2013-01-21 21:58


조선시대 문종(5대) 즉위년에 문과에 급제한 홍우성(洪禹成·개명 允成)은 승승장구해 세조(7대) 때는 영의정에 올랐다. 회인(懷仁) 홍씨인 그의 집안엔 직계 3대조까지 벼슬 근처에 가본 사람이라곤 없었다. 평민 출신의 그가 출세할 수 있었던 데는 과거제가 발판이 됐음은 물론이다. 연산군(10대) 때 성균관 전적(정 6품)을 지낸 나승간(羅承幹)은 본관이 정산(定山)이다. 그는 족보조차 갖지 못한 집안에서 벼락출세했다. 관직에 나간 후 그는 정산나씨의 시조가 됐다.

흔히 조선시대는 양반 신분이 세습되던 꽉 막힌 사회로 알려져 있다. 조선사 연구에 천착해온 한영우(74) 이화여대 석좌교수가 이런 통념과 달리 조선시대가 과거제를 통해 얼마든지 신분 상승이 가능했던 역동적 사회였음을 밝혀낸 ‘과거, 출세의 사다리’(지식산업사)를 21일 출간했다.

한 교수는 5년에 걸친 연구를 통해 조선 500년을 이끌어간 정치엘리트인 문과급제자 1만4615명 전원의 신분을 조사했다. 이번 책은 1차로 중기까지인 태조∼선조까지만 다룬다.

결과는 놀라웠다. 평민 등 신분이 낮은 급제자가 전체 급제자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태조∼정종 40.4%, 태종 50.0%, 세종 33.5%, 문종∼단종 34.6%, 세조 30.4%, 예종∼성종 22.2%, 연산군 17.1%, 중종 20.9%, 명종 19.8%, 선조 16.7% 등으로 나타난 것이다.

한 교수는 “‘가진 자’들이 권력을 세습하는 현상은 조선 중기에나 나타났다”면서 “하지만 이처럼 조선 초기만 해도 신분이 낮은 급제자의 비율은 40∼50%나 됐고, 18세기 후반이 되면 신분제가 무너져 고종 때는 이 비율이 58%로 다시 높아진다”고 말했다.

그동안 학계에선 조선 초기부터 권력 세습에 의한 문벌이 형성된 것으로 봤다. 이는 과거 합격자 명단인 방목(榜目) 연구에 한정해 특정 가문의 과거제 합격 비율이 높게 나오자 이를 확대 해석한 오류 탓이다. 한 교수는 합격자들의 신분 파악을 위해 족보, 실록까지 총동원했다.

한 교수는 “조선 시대 신분 상승이 가능했던 건 서얼과 노비를 제외하고 평민 이상에게 과거 응시 기회가 개방된 덕분”이라면서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있었던 과거 제도의 전통이 오늘날 역동적인 한국 사회를 만든 토대가 됐다”고 말했다.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