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방우체국-도미니카 김성자 선교사] (1) 고난의 땅으로 사명을 받다

입력 2013-01-21 18:07


자연재해 중남미 산속 마을로 보내신 까닭은…

카리브해의 섬나라 도미니카공화국은 고난의 역사를 가진 곳이다. 1492년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이후 스페인의 첫 식민지가 돼 원주민은 16세기 중에 전멸했다. 1795년 프랑스에 이양됐고 프랑스령인 아이티의 점령과 독립, 스페인의 재통치, 독립, 아이티의 재점령을 거쳐 1844년 공화국 건립을 선포하고 완전한 독립을 이뤘다.

도미니카공화국은 서인도제도에서 쿠바섬 다음으로 큰 이스파니올라섬의 동쪽 3분의 2를 차지하고 있고, 서쪽 3분의 1은 아이티공화국이다. 도미니카공화국은 스페인어, 아이티는 프랑스어를 사용한다.

도미니카공화국의 면적은 남한의 절반 정도(4만8670㎢)이고 인구는 1008만명이다. 수도는 신대륙 개척자들의 활동 본거지였던 산토도밍고로 360만명이 거주하고 있다. 물라토(백인과 흑인의 혼혈)와 메스티소(중남미 원주민과 백인의 혼혈)가 인구의 대다수(73%)를 차지하고 있으며, 나머지는 백인(16%)과 흑인(11%)이다. 종교는 천주교 인구가 대부분(80%)이고 개신교는 15%에 불과하다. 화폐는 페소(peso)를 사용한다. 열대성 해양기후로 일년에 수십 차례 열대성 폭풍과 허리케인이 불어와 재해를 일으킨다.

이곳 사회는 인종과 계급이 뚜렷하게 구분돼 있다. 빈부의 차이가 극심한, 전형적인 후진국 스타일이다. 소수가 사회의 부를 장악하고 있고 대다수 시민들은 생존을 위해 투쟁하고 있다. 노동인구의 절반 이상이 사탕수수, 담배, 카카오, 커피, 열대과일 등을 재배하는 농업에 종사한다. 전기 사정이 열악해 빈민촌에선 하루에 8∼10시간 정도만 전기를 사용할 수 있다. 빈민촌이 아닌 지역에서도 아침저녁으로 전기가 자주 끊겨서 매우 불편하다. 물도 석회수이기 때문에 식수는 사서 먹어야 한다. 오래된 7인승 승합차가 주된 대중교통수단인데 요즘엔 버스도 많이 운행하고 있다.

생활필수품의 대부분을 수입하는 형편이라 물가가 비싼 편이다. 주민들은 주로 빵과 구근식물(감자·유카 등)을 요리해서 먹고, 점심에는 밥과 닭고기를 먹는 경우가 많다. 전통음식으로는 산꼬초(sancocho)와 둘세 데 레체(dulce de leche)가 유명하다. 산꼬초는 고기와 유카, 옥수수 등을 넣고 끓인 수프고, 둘세 데 레체는 우유와 설탕으로 만든 ‘밀크 잼’이다.

이곳 사람들은 대체로 순박하다. 활기찬 민속음악인 메렝게(merengue)에 맞춰 춤을 즐기는 여유로운 국민성을 갖고 있다. 또 모든 국민이 야구를 열광적으로 좋아한다. 야구 실력도 뛰어나 미국 메이저리그에 120여명의 도미니카공화국 선수들이 진출해 있다. 이혼율이 유난히 높은 점도 특이하다. 성인여성의 60% 이상이 혼자서 자녀를 양육하며 힘들게 살고 있다.

주님은 교회 일에 얽매여 바쁘게 살아가던 나에게 찾아오셔서 선교사의 소명을 주셨다. 여성의 몸으로 고국을 떠나 외지에 나가서 혼자 사역을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 때문에 우리 가족들은 몹시 불안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내게 용기를 주시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광야를 지혜롭게 걸어가게 하셨다.

선교지로 나가기 전에는 교회 일을 계속하면서 남보다 훨씬 더 부지런하게 선교사로서 필요한 부분들을 채워가야 했었다. 새벽예배 끝나고 학원에서 영어공부를 했고, 퇴근 후에는 밤 10시까지 지휘, 기타, 큐티 공부 등을 하며 선교의 길을 준비했다. 주님이 부르실 때마다 환경이 좋든 나쁘든 순종하고 늘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살았다. 주님은 이 부족한 사람을 선교사로 불러 주시고 여러 해 동안 훈련을 통해 선교사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준비시키셨다.

오랜 노력 끝에 기독교대한감리회(기감) 선교국에서 실행하는 선교사 훈련과정을 모두 통과해 선교사 인준을 받고 1997년 5월 선교지인 도미니카공화국에 첫발을 디디게 됐다. 우선 선배 선교사가 사역하고 있던 산티아고에서 협력선교사로 3개월 동안 일하면서 선교라는 게 어떤 것인지 조금은 알게 됐다. 현지 주민들과 인간관계를 잘 맺어 서로 협력하는 게 중요하기 때문에 선교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라는 것을 배웠다.

그러다 목사 안수 준비와 선교사 파송 예배 등 한국에서 정리해야 할 일이 있어 선교지를 떠나 잠시 귀국했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길에 마음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한 것은 선교지의 열악한 환경과 무더운 더위와 모기떼 때문만은 아니었다. 당시 한국의 경제 사정이 급격히 나빠져 대부분의 교회에서 헌금이 줄고 해외선교의 길도 좁아지고 있었기 때문에 마음이 흔들린 것이다.

1998년 IMF 구제금융 시기에 세계 각국에 나가 있던 선교사 중에는 한국교회가 당한 어려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귀국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주님은 나에게 다시 선교의 길을 열어주셨다. 그해 3월 기감 경기연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고, 5월에는 노곡감리교회에서 시무하시던 조용순 목사님께서 노곡교회 100주년 행사를 그만두고 나를 도미니카공화국 선교사로 파송해주셨다. 조 목사님은 지금까지도 아낌없이 기도와 물질로 후원해주시는 귀한 분이다. 내가 선교사로 살아가면서 평생 잊어서는 안 될 은인이다.

그해 9월 어느 날, 사나운 허리케인 ‘조지’가 산토도밍고 전역을 폐허로 만들었다. 수많은 주민들이 가족의 생명과 재산을 잃어버리는 참사가 발생했다. 허리케인 때문에 전기와 수도가 끊겼고 전화와 인터넷도 불통이어서 모든 소식이 두절됐다. 당시 내가 세 들어 살던 집에는 강한 바람에 조각난 창문 틈으로 물이 들어와 비가 그칠 때까지 퍼냈던 기억이 생생하다.

나는 화장실에 숨어서 “주님, 이제 선교사로 이곳에 온지 4개월밖에 안됐습니다. 선교를 제대로 시작하지도 못하고 창피하게 이대로 죽을 수는 없습니다. 빨리 허리케인이 지나가게 하시고 주님이 보내신 목적을 이루게 하소서”라고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했다. 베란다에서 밖을 보니 집 앞의 수십년 된 나무들이 허망하게 쓰러져 있었다.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허리케인의 무서운 위력을 경험했다. 많이 놀란 탓에 후유증으로 온몸에 피부병이 번졌다. 선교지에서 6개월 동안 피부병으로 고생하다가 결국엔 한국 피부과에서 두 달 동안 치료를 받고 겨우 나았다.

허리케인이 지나간 후 찾아간 첫 번째 선교지는 산토도밍고 서쪽 산속 마을 무차아구아(Mucha Agua)였다. 당시 그곳에는 물도 전기도 없었고, 주민들은 문화적 혜택도 전혀 받지 못한 채 아무런 소망 없이 살아가고 있었다. 여자아이가 14살이 되면 눈이 맞은 남자와 결혼해 아이 낳고 사는 게 전부였다.

주님은 이 미개한 산속 마을 사람들에게 지대한 관심이 있어서 우리를 보내신 것이다. 특히 이곳에도 허리케인이 큰 상처를 남겨 주민들을 힘들게 하고 있었다. 비바람이 모든 열매를 휩쓸어간 데다 가축들마저 급류에 떠내려간 상태였다. 나는 우선 필요한 양식과 의약품, 헌옷, 채소 씨앗을 사서 마을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 이런 노력으로 주민들과 조금씩 친숙해졌고 망고나무 밑에서 그들에게 복음의 씨앗을 심었다. 그렇게 산속 선교는 시작됐다.

김성자 선교사

·기독교대한감리회(기감) 소속 선교사

·1956년생. 94년 협성대 신학대학원 졸업. 98년 3월 목사 안수

·98년 5월 도미니카공화국 파송

·도미니카공화국에서 무차아구아감리교회, 산토도밍고감리교회 등 개척. 비전크리스천초등학교, 청소년예술학교 등 개교. 지진피해 아이티에서 2년간 선교·구제사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