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차인홍 (1) 두살 때부터 ‘소아마비’ 고통… 암울한 유년기
입력 2013-01-21 18:10
겨울방학이 짧은 미국 오하이오주 라이트주립대학은 벌써 새 학기가 시작됐다. 2000년 이 대학의 음악과 교수가 된 나는 늘 휠체어에 몸을 싣고 설레는 마음으로 교정에 들어선다. 아무리 추운 날에도 양복 재킷 하나만 걸친 채 차가운 공기를 가르며 교정에 들어서는 이 기분을 만끽한다.
유독 추운 올 겨울 캠퍼스를 거닐면 춥고 배고팠던 어린 시절이 아련히 떠오른다.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했던 그 시설을 돌아보면 지금 휠체어를 밀고 달릴 수 있는 그 자체로 감사하다. 무엇보다 어려움을 이겨내고 한국 장애인 최초의 미국 음대 교수이자 바이올리니스트로 설 수 있도록 힘을 주신 하나님께 그 영광을 돌린다.
나는 인생의 고비마다 나를 올바른 길로 인도해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간증하지 않을 수 없다. 주님은 내가 주저앉을 때마다 나를 일으켜 세워주셨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도 당당하게 연주할 수 있는 용기를 불어넣어 주셨다. 하나님은 나를 빚으시고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시고 보잘 것 없는 나를 여기까지 오게 해 주신 내 인생의 마에스트로다. 아울러 한결같은 기도로 내 곁을 지켜준 아내와 두 아들 차진, 차용에게도 사랑한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1958년 나는 대전에서 작은 가게를 하는 가정의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돌이 지났을 때 의자나 벽을 짚고 일어나 걸음을 떼려고 했지만 자주 중심을 잃고 쓰러지곤 했다고 한다. 또 나의 부모님은 이따금 온몸에 열이 났던 나를 지켜보며 독감이라고 여기셨다.
그때만 해도 가족 모두는 소아마비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두 살 이후로 내 한쪽 다리는 힘을 잃었고 나머지 한쪽도 약간의 힘만 남아 있을 뿐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게 됐다. 목발을 짚지도 못할 만큼 양쪽 다리를 모두 못 쓰게 됐다.
어두운 시기였다. 어린시절 대부분은 집 안에서만 보냈다. 당연히 휠체어를 타야 했지만 가난한 그 시절에는 휠체어라는 게 있는지도 몰랐다. 부모님은 용하다는 한의사를 찾아가 침을 맞게 하셨지만 병세는 나아지지 않았다.
가족 모두가 나를 치료하는 데 매달렸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몸은 나아지지 않았고 치료비만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가세는 급격하게 기울었다. 설상가상 아버지까지도 병에 걸려 직장을 그만두고 집에 머무르시게 됐다. 그때부터 어머니는 가게를 처분하고 하숙집을 운영하셨다.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갈 때쯤 암울한 분위기는 이루 말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가게를 하던 때보다 살림살이는 더욱 궁핍해졌다. 아버지는 몸져누워 계셨고 어머니는 온종일 청소를 하고 하숙생들의 빨래를 하고 밥을 하느라 늘 피곤해보였다. 그리고 목발도 짚을 힘조차 없어 몸을 질질 끌며 방안에만 있던 아들….
가장 견딜 수 없던 것은 창 너머로 동네 아이들이 왁자지껄 떠들고 노는 소리가 들려올 때였다. 그럴 때마다 나는 형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고, 형은 나를 업고 동네 버스 정류장으로 갔다. 그 정류장은 종점이었다. 버스 맨 앞자리에 앉은 나는 종점에서 종점까지 짧은 여행을 할 수 있었다. 하숙생들의 등에 업혀 산으로 들로 소풍을 갔던 것도 잊을 수 없는 기억이다. 그때 본 산야의 푸르름은 지금도 내 가슴속에 잊지 못할 감흥으로 남아 있다.
◇약력 △1958년 대전 출생 △미국 신시내티대 졸업 △미국 뉴욕시립대 석사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주립대 박사 △대전시립교향악단 악장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 필하모닉 바이올린 수석 △해외유공동포 대통령상 수상 △현 미국 오하이오주 라이트주립대 부교수 겸 대학 오케스트라 지휘자
정리=김경택 기자 ptyx@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