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을새김-성기철] 황희+채제공
입력 2013-01-21 18:41
박근혜 정부 첫 국무총리 후보자 지명이 임박했다. 첫 총리는 새로 출범하는 정부의 성격을 나타내는 데다 대통령 당선인의 향후 국정운영 스타일을 가늠케 하는 것이어서 국민의 이목이 쏠리고 있다.
우리 헌법은 국무총리의 지위에 대해 ‘대통령을 보좌하며, 행정에 관하여 대통령의 명을 받아 행정각부를 통할한다’고 규정하고 있다(제86조 2항).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국무위원 임명 제청권과 해임 건의권을 부여했다(제87조 1항과 3항). 총리가 행정부의 2인자임을 최고법이 보장한 것이다. 하지만 헌정사상 이런 막강한 권한을 제대로 행사한 총리는 거의 없다. 김대중 정부 때의 김종필·박태준 총리가 손에 꼽힐 뿐이다. 김영삼 정부 당시 이회창 총리는 법 규정대로 권한을 행사하려다 4개월 만에 자리를 내놔야 했다.
차기 정부 총리 위상 높아질 듯
역대 대부분의 국무총리들은 ‘의전총리’ ‘방탄총리’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다. 대통령을 보좌하기는 했어도 행정각부를 통할하는 것은 역부족이었다. 정권 실세가 주로 맡는 대통령 비서실장이나 국정원장에게 휘둘리기 일쑤였고, 심지어 대통령 신임이 두터운 청와대 수석비서관보다 힘을 쓰지 못한 총리도 수두룩했다. 대통령 눈치만 살피다 그만둔 총리도 있다. 인사권이 실질적으로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란 분석이 맞을 게다.
다행히 박근혜 당선인은 대선기간 현재의 제왕적 대통령제 폐해를 시정하기 위해 권력을 분산시키겠다는 발언을 여러 차례 했다. 사문화되다시피 한 국무위원 임명 제청권 등을 실질적으로 보장함으로써 총리의 내각 장악력을 높이겠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국정을 사실상 좌지우지해 온 청와대의 조직 슬림화를 결정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총리의 위상이 크게 높아질 것임을 예상케 한다. 적어도 몇몇 대통령 측근들이 국정을 쥐락펴락하는 폐단만은 해소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이것이 현실화될 경우 새 정부 첫 총리는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으로 불리던 조선시대 영의정의 지위와 권능을 확보할 수도 있겠다. 조선 500년 동안 수많은 영의정이 거쳐 갔지만 나는 세종시대 황희와 정조시대 채제공을 최고 명재상으로 꼽는다. 황희는 조선의 태평성대를 연 인물이며, 채제공은 조선의 제2 부흥기를 이끈 사람이다. 두 영의정은 이 시점 박근혜 당선인이 찾는 총리감과 코드가 딱 맞다.
황희의 경우 매우 청빈한데다 성품이 너그럽고 어질어 국정을 안정적으로 이끌었다. 국민통합형에 부합한다. 또 곡식 종자를 획기적으로 개량함으로써 농가 생산성을 크게 높이고, 전국에 뽕나무를 많이 심도록 해 서민들의 의생활을 눈에 띄게 개선했다. 민생정부 책임자의 이미지다. 국방에도 심혈을 기울여 북쪽 야인과 남쪽 왜의 준동을 막았다. 4군6진 개척과 대마도 정벌은 대표적인 결과물이다. 박 당선인의 튼튼한 안보 공약과 맞아떨어진다.
청빈·포용·민생 감안해 인선해야
채제공 역시 국민통합형 재상이었다. 정조의 탕평책을 탄탄한 이론과 끈질긴 실천으로 뒷받침했다. 당쟁을 타파하라는 내용을 골자로 한 ‘6조 진언’이 그것이다. 성리학에 사상적 기반을 둔 관료들에 맞서 천주교와 불교 신자들을 처벌하기보다는 설득과 교화의 대상으로 삼았다. 또 대상공인의 특권을 폐지하고 소상공인의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토록 하는 ‘신해통공(辛亥通共)’ 정책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경제민주화 및 중소기업 중시 정책과 궤를 같이 한다.
박 당선인이 총리 후보자를 낙점하면서 두 영의정이 추구했던 바를 염두에 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봤다. 시대의 간극은 크지만 국리민복을 최고의 가치로 삼아야 하는 국가 지도자의 생각엔 별 차이가 없겠기 때문이다.
성기철 편집국 부국장 kcs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