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안현미] 도시락 ‘셔틀’
입력 2013-01-20 19:44
수진이를 처음 만난 건 고등학교 2학년 때다. 88서울올림픽이 성공적으로 막을 내린 직후라 여기저기 구석구석 활기가 넘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나는 가정형편 때문에 상업고등학교로 진학한 내 처지를 비관하느라 바빠서 활기는커녕 죽지 못해 학교만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당연히 친한 친구도, 좋아하는 선생님도 없던 시절이었다. 게다가 식구들과 모여 살 집이 없어져서 나만 혼자 사돈댁 친척집 무남독녀 외동딸의 입주 가정교사로 들어가 얹혀살고 있었는데 말이 입주 가정교사이지 당장 오갈 데 없는 나를 안쓰럽게 여긴 그분들의 따뜻한 배려임을 모르지 않았다.
그런 처지에 새벽부터 도시락을 싸겠다고 소란을 떨며 그분들의 단잠을 깨울 수는 없었다. 그래서 아침은 굶고 등교했고, 점심은 매점에서 빵과 우유를 사먹곤 했다(물론 그분들은 개의치 말고 내 집처럼 편하게 아침도 챙겨먹고 도시락도 싸가지고 다니라고 말씀하셨지만).
그런 처지를 어찌 알았는지 반장이었던 수진이가 어느 날 내게 도시락을 내밀었다. 혹시 내가 자존심에 상처라도 입을까 봐 조심스럽게 흔들리는 눈빛으로. 그 후 학년이 바뀌어 다른 반이 됐는데도 수진이의 도시락 ‘셔틀’은 졸업할 때까지 쭉 계속됐다.
몇 달 전 다니고 있는 직장에 누군가 개를 버리고 갔다. 아마도 넓은 정원이 있으니 잘 키워줄 수도 있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키우는 동안은 사랑을 많이 받았는지 처음 보는 우리에게도 꼬리를 흔들고 붙임성이 좋은 게 활기 있고 명랑한 녀석이었다. 그러나 계획된 일도 아니고 느닷없이 개를 키우는 일은 난감한 일인지라 유기견 보호센터로 보내게 되었다. 그때 처음 알았다. 유기견은 10일 안에 주인이 찾아가거나 입양되지 않으면 안락사 시킨다는 사실을.
한 목숨을 책임진다는 게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를 잘 아는지라 보호센터에 보낸 후에는 모른 체 하고 싶었다. 그러나 어떤 인연의 끈이 있었는지 녀석은 지금 우리와 함께 살고 있다. 추위와 더위를 피할 안락한 집을 만들어 주고 하루에 두 번씩 산책도 시킨다. ‘달림’이라는 이름도 지어 줬다. 가끔 사람들이 먹는 음식을 사료보다 더 좋아하는 녀석을 위해 우리는 조금씩 밥을 남겨 점심 도시락 셔틀도 하고 있다. 사랑이 많은 새 주인이 나타날 때까지 도시락 셔틀은 계속될 것이다.
안현미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