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김찬희] 관치금융
입력 2013-01-20 19:00
1933년 독일은 유럽에서 가장 미래가 어두운 나라였다. 1차 세계대전 패전과 살인적 인플레이션, 대공황은 국가를 파산으로 몰아넣었다. 국민의 90%가 빈민층이었고 실업률은 34.36%에 이르렀다. 치솟는 물가 때문에 돈의 가치가 빠른 속도로 떨어져 하루에 두 번씩 월급을 줄 정도였다. 30년 230억 마르크였던 국민총소득(GNI)은 32년 110억 마르크로 반 토막이 났다.
그해 1월 총리로 취임한 아돌프 히틀러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경제파탄을 해결해야 했다. 히틀러는 23∼30년 라이히스방크(당시 독일 중앙은행) 총재를 지냈던 햘마르 샤흐트(1877∼1970)를 급히 불렀다.
샤흐트는 마법을 보여줬다. 라이히스방크 총재와 경제장관을 겸임한 33년부터 5년 동안 실업률은 5.5%로 뚝 떨어졌다. 262만7000여개의 새로운 일자리가 만들어졌다. 국민총생산(GNP)은 40% 정도 늘었다. 그야말로 상전벽해(桑田碧海)였다.
샤흐트의 마법은 ‘네오플란(Neoplan)’으로 불렸다. 네오플란의 핵심은 상거래·무역·관세·투자·자본시장·외환거래 등을 정부가 직접 통제하는 관치금융이다. 전쟁을 반대했던 샤흐트는 37년 경제장관, 39년 라이히스방크 총재 자리를 내놓았다.
관치금융의 명맥은 일본의 이치마다 히사토에게 이어졌다. 라이히스방크에서 2년 동안 연수를 했던 이치마다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샤흐트를 일본으로 초대하기도 했다.
이치마다는 일본은행(BOJ) 총재에 앉아 전후 부흥을 주도했다. 엔화를 찍어내 은행의 부실채권을 털어주는 대신 은행이 정부 채권을 우선 매입하도록 했다. 금융(은행)을 장악해 경제를 좌지우지했다. 이치마다의 관치금융은 박정희 정부의 모델이 됐다.
관치금융은 화력을 집중해 일사불란하게 위기를 돌파하는 강력한 수단이다. 관(官)이 치(治)하지 않으면 금융은 거품을 만들어내고, 탐욕으로 물든다. 반면 관치가 길어지면 왜곡·불법·부패의 독버섯이 자라난다.
학계나 관료사회는 우리나라의 관치금융이 97년 외환위기 이후 사라졌다고 평가한다. 다만 관치금융의 그림자는 여전하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주요 금융지주회사 회장 자리에 친(親) 정권인사를 앉히는 관치인사가 대표적이다.
소극적 혹은 부분적 관치금융이라고 부를 수 있는 정책금융은 필요하다. 그러나 구태를 반복하는 관치인사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다. 박근혜 정부에서는 어설픈 관치인사를 더 이상 보지 않았으면 한다.
김찬희 차장 ch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