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을 넘어 미래한국으로 (2부)] 獨 “기업가 정신 위축시킨다”… 배임죄 사실상 사문화

입력 2013-01-20 18:36


‘경영판단의 원칙’ 정착… 합리적 결정은 존중

2000년 초 독일 뒤셀도르프에 본사를 둔 이동통신사 마네스만(Mannesmann)은 영국 이동통신업체인 보다폰(Vodafone) 그룹에 인수된다. 독일 대기업이 외국 기업에 인수된 전례가 없어 당시 논란이 많았다.

특히 마네스만 경영진이 보다폰으로부터 합병에 따른 거액의 보수를 받은 것이 발각되면서 국민적인 공분이 일었다. 이후 경영진 배임 등에 관한 형사 소송이 진행됐지만 뒤셀도르프 지방법원은 모두 무혐의로 처리했다. 상고심을 담당한 연방대법원이 1심 판결을 파기하면서 다시 뒤셀도르프 지방법원으로 돌려보냈지만 파기사건을 맡은 재판부마저 이 사건에 대해 공소를 취소했다.

독일은 1851년 세계 최초로 배임죄를 형법에 규정한 국가다. 그럼에도 독일에서는 배임죄와 관련된 형사처벌 사례를 찾아보기 어렵다. 2000년 이후에는 ‘마네스만 사건’이 유일할 정도다. 배임죄 처벌은 물론 기소되는 경우가 드물다. 더구나 마네스만 사건은 손해를 입은 상대가 명확했음에도 불구하고 기부조건부 공소취소제를 활용, 경영진은 배임죄로 인한 형사처벌을 받지 않았다.

독일연방상공회의소 일자 노트나겔 대외무역 담당 이사는 “독일에서 배임죄화 관련해 형사처벌 받는 경우는 극히 드물며 설사 배임으로 판단되는 경영관련 행위가 있었다고 해도 대부분 CEO 교체로 마무리된다”고 말했다.

독일에서 경영행위 관련 배임죄에 대한 형사처벌이 사실상 사라진 것은 2005년 주식법 개정이 계기가 됐다. 주식법 제93조의 ‘주의 의무’ 조문 뒤에 ‘경영 판단의 원칙’을 신설했다. 경영 판단의 원칙은 회사 업무에 관한 경영 이사의 결정이 적절한 정보에 근거하고, 회사의 이익을 위해 이뤄진 것임이 합리적인 방법으로 인정될 때는 의무 위반으로 보지 않는다는 내용이다. 경영실패에 대해 민사상 손해배상 책임을 묻고, 여기에 업무상 배임죄로 형사처벌까지 할 경우 경영진의 기업가정신이 크게 위축되는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에 이 같은 조항이 신설된 것이다.

독일이 경영판단 원칙에 관한 규정을 명확히 하고 있는 반면, 우리나라 형법은 ‘타인의 사무를 처리하는 자가 그 임무에 위배하는 행위’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에 따라 배임 행위 기준이 분명하지 않다는 논란이 계속돼 왔다. 특히 업무상 배임 여부가 재판부나 여론에 따라 들쭉날쭉해 경영인의 판단을 위축시키며 이로 인한 사회적 손실이 발생하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지난해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이 배임 혐의로 법정구속됐을 때도 배임 행위의 기준을 놓고 논란이 일었다. 당시 계열사 부실 징후가 있어서 지원한 것을 놓고 재판부가 배임 행위로 인정한 것은 손해를 입힐 위험만 있어도 배임 행위에 해당돼 처벌받을 수 있다는 판례를 남겼다.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최준선 교수는 “우리나라 형법상 배임죄의 문제는 손해가 발생하지 않고, 손해발생 위험만 있어도 처벌하게 돼 있다는 점”이라며 “배임은 곧 신뢰를 저버렸다는 윤리적 문제인데 형법으로 처벌하는 것은 범죄와 형벌을 미리 법률로써 규정하여야 한다는 죄형법정주의에 위배될 소지도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형법에 배임죄를 규정한 일본도 ‘이익을 도모할 목적이나 손해를 끼칠 목적’이라고 배임죄 구성요건을 명시하고 있는 데 반해 우리나라 형법은 구성요건 지표가 명확하지 않다”고 덧붙였다.

재계 역시 경제 민주화 바람으로 경영자의 배임혐의에 대한 형사처벌을 강화하는 추세를 우려한다. 기업의 투자결정 등이 항상 실패 위험을 내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경영상 판단이 배임혐의라는 테두리 안에 묶여 있을 경우 투자 및 고용 위축 등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반대로 기업활성화 정책을 통해 경제 위기를 극복하고 있는 독일의 경우 기업 경쟁력 강화에 초점을 맞춘 법과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코트라 김평희 글로벌 연수원장은 “진보정당인 사민당(SPD) 출신 슈뢰더 정권조차 ‘어젠다 2010’이라는 기업친화적인 정책을 통해 위기 극복에 나선 바 있으며 보수정당인 기민당(CDU) 정권도 이 정책을 이어받았다”고 말했다.

베를린=한장희 기자 jhha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