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열며-이흥우] 은지원도, 김여진도 보고싶다

입력 2013-01-18 18:14


5공(共) 시절, 한 탤런트가 어느 날 브라운관에서 조용히 사라졌다. 전두환 당시 대통령과 닮았다는 이유로 그는 모든 프로그램에서 퇴출됐다.

요즘 같았으면 여기저기 출연하느라 제법 큰 돈을 만졌을 텐데 시대를 잘못 만난 그는 돈 구경은커녕 생활고에 시달려야 했다. 30대 중반의 나이에 밥줄이 끊긴 그는 아내와 세 남매를 부양하기 위해 방앗간을 차렸다고 한다. 그의 손엔 드라마 대본 대신 참기름 통이 들렸다. 전도유망했던 조연배우는 졸지에 방앗간 주인으로 인생이 뒤바뀌었다.

정권이 바뀐 노태우 대통령 시절에도 그의 모습을 TV에서 볼 수 없었다. 그를 브라운관에서 다시 볼 수 있었던 것은 사회 곳곳에서 민주화 욕구가 강하게 분출했던 문민정부 출범 후였다. 그는 범죄가 아닌 이유로 방송활동이 금지된 최초의 연예인이 아닐까 싶다.

세월이 흘렀다. 권위주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 탤런트 박용식 스토리는 오랫동안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옛날이야기로 치부됐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이와 유사한 논란이 재연되고 있다.

조상에게 물려받은 생김새를 트집 잡는 저급하고 유치한 짓은 사라졌다. 대신 정치적 소신이 문제돼 방송 출연이 취소되거나 금지됐다는 시비가 끊이질 않는다. 표현의 자유가 확대되고,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보급이 보편화되면서 특정 정치 사안이나 사회 현상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적극적으로 표출하는 대중연예인, ‘폴리테이너’ ‘소셜테이너’들이 증가한 까닭이다. 이들은 젊은층 사이에서 ‘개념연예인’으로 불리며 상당한 주목을 받고 있다. 때문에 자신들의 인기를 높이고 유지하기 위해 SNS에 정치적 발언을 남발한다는 비판이 없는 것도 아니다.

흔히들 대중연예인을 ‘공인’이라고 한다. 그래서 의사 표현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의견이 적지 않다. 공적인 일에 종사하는 사람, 공인(公人)의 사전적 의미다. 연예활동이 공적인 일이 아니듯, 연예인은 공인이 아니다. 대중에게 미치는 영향이 커 그런 별칭이 붙은 듯하나 이들도 국민의 한 사람으로 자유롭게 자신의 의사를 표시할 권리가 있다. 정치적 중립은 이들에게 해당되지 않는다.

지난 대통령선거 기간 박근혜, 문재인 후보 캠프에서 활동한 연예인이 적지 않다. 치열했던 선거는 끝났다. 그러나 뒤끝은 여전하다. 얼마 전 배우 김여진씨는 트위터에 섭외된 프로그램에 출연이 취소됐다는 취지의 글을 올렸다. 자신이 문재인 캠프와 연관 있어 그리 됐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이전에도 방송사들이 이명박 정부에 비판적인 연예인 프로그램 진행자를 강제 하차시킨 전례가 있어 신빙성이 전혀 없는 얘기는 아니다.

정치적 중립을 요하는 시사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게 아니라면 담당 PD가 처음 의도한 대로 김씨를 출연시키는 게 자연스러워 보인다. 경제는 경제논리로 풀어야 하듯이 방송 출연 여부를 정치적 잣대로 결정한다면 대한민국은 결코 정치선진국, 문화선진국이 될 수 없다. 법 앞에 모든 국민의 평등을 선언한 헌법 11조 1항은 누구든지 성별, 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받지 않는다고 규정하고 있다.

방송 출연금지 논란은 박근혜 당선인이 국정 최우선 과제로 삼은 국민대통합 정신에도 어긋난다. 박 당선인의 뜻도 아닐 것이다. 아세(阿世)의 무리들이 지레짐작으로 기었을 게 분명하다. 은지원도 김여진도 방송에서 보고 싶다.

이흥우 문화생활부 선임기자 hw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