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현의 사막의 구도자들] 만남과 수용
입력 2013-01-18 18:09
몬트리올 상점의 계산대 앞에 서면 점원은 으레 ‘봉주르, 하이’ 하고 인사를 한다. 그럼 선택권은 곧장 손님에게로 넘어간다. 손님이 ‘봉주르’라고 대답하면 그때부터는 프랑스어로 대화가 이어지고, ‘하이’라고 대답하면 영어로 대화가 오간다. 인구 250만의 몬트리올은 세계 최대의 프랑스어와 영어 이중 언어 도시다. 때문에 여기에서 맥도날드 아르바이트라도 하려면 두 가지 언어를 다 구사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 옆집에 에콰도르 출신 아저씨가 ‘카스트로’라는 이름의 커다란 개와 함께 살고 있다. 그런데 견공(犬公) 카스트로조차도 영어는 물론 몇 마디 프랑스어까지 알아들을 정도이니 서당 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 옛말이 꼭 빈말은 아닌 듯싶다.
몬트리올의 외국인들
우리가 사는 집 맞은편에는 집 소유주인 이탈리아 출신 할아버지가 살고 있다. 이 할아버지는 영어나 프랑스어를 할 줄 몰라 내가 뭘 물어보면 줄기차게 이탈리아어로만 대답한다. 만 네 살이 된 나의 막내딸아이 ‘예나’가 다니는 동네 유치원은 안 좋기로 소문이 나 있지만 유치원 원장인 이집트 아저씨는 친절한 사람이다. ‘예나’의 유치원 친구 중 ‘야나’라는 이름의 몰도바 출신 아이가 있다. 몰도바는 러시아와 루마니아 사이에 있는 작은 나라다. 예나와 야나는 서로 말이 안 통하지만 루마니아 출신 선생님들이 다수인 유치원에서 서로 친하기로 정평이 나 있다.
이곳 몬트리올에서 눈을 들어 만나는 사람 대부분은 우리처럼 외국인이다. 세계 도처에 있는 이질적인 문화권의 사람들을 대거 받아들여 낯선 자들끼리의 이방인 사회를 만들어 놓고도 1, 2층 유리창에 안전장치 하나 없이 평화로이 살아가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소통과 융합은 오늘날의 화두다. 하지만 눈을 돌려 과거 역사를 보노라면 진보와 변화는 늘 이질적인 문화를 수용하면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기독교만 해도 지중해의 문화적 토양이었던 헬레니즘적 요소를 받아들이면서 발전해가지 않았던가. 그 대표적인 예가 소테르(sother·구주)와 ‘선한 목자’라는 표현이다. 구주라는 표현은 본래 알렉산더 대왕의 장군으로 이집트에 그리스 왕조를 세웠던 프톨레마이오스 1세를 신성화하기 위해 처음으로 사용된 후 군주들을 지칭하는 데에 널리 애용됐다. 신약성경의 기자들은 이 용어를 빌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눅 1:47), ‘세상의 구주’(요 4:42) 등으로 지칭한다.
예수님 자신도 헬레니즘 문명의 상징을 손수 이용했다. 그리스 문화에서는 ‘헤르메스 목자상’이 널리 퍼져 있었다. 이 목자상은 가축의 신 헤르메스(Hermes)가 양을 어깨에 둘러멘 모습을 표현한 것이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리스 문화의 ‘헤르메스 목자상’을 빌려 자신을 ‘선한 목자’(요 10:11, 눅 15:4∼6)로 지칭했다. 오늘날 우리 신앙에 친숙한 여러 개념이 실제로는 헬레니즘 문화의 결실을 차용한 것이라니 역사가 담고 있는 문화의 융합은 실로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우물과 같다.
4세기의 기독교 영성도 당시 공용어인 그리스어를 사용하던 주류 기독교권과 이집트의 콥트 문화라는 두 정신세계가 서로 만나 하나로 어우러진 결과 생성된 것이다. 기독교 영성의 근원인 수도적 삶이 탄생한 곳은 이집트였다. 그런데 이집트의 사막 기독교인들 중 그리스어를 아는 자는 거의 없었다. 버려진 죽음의 땅 사막을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장소로 선택한 최초의 인물 안토니오스, 그는 그리스어를 읽을 줄도 쓸 줄도 모르는 무식자였다. 암모니오스, 마카리오스 등의 사막 영성의 거장들도 이집트 시골 출신의 무식자였다. 323년 이집트의 타벤네시스에 수도원을 창시했던 파코미오스는 자신의 수도원을 찾아왔던 그리스어권 기독교인들에게 그리스어로 설교를 하고자 했다. 이런 목적 하에 그리스어를 공부해 보았지만 실패했다. 콥트어를 구사하는 어른이 그리스어를 배운다는 것은 아메리카 인디언이 라틴어를 배우려는 것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투박한 데다 학문도 결여돼 있던 이집트의 콥트 영성이 에바그리오스처럼 그리스어를 구사하는 문명세계의 유식한 기독교인들과 조우하면서 4세기에 기독교 영성의 시대가 활짝 꽃피고 이어져 내려갔다. 유식한 기독교가 무식한 콥트 영성에 큰 빚을 진 것이 아이러니하다.
낯선 것과의 만남
낯설고 이질적인 것을 접해 내 것으로 수용하는 자세는 답답하게 정체된 정신을 생기발랄한 약동으로 새롭게 한다. 이는 문명사나 영성의 역사가 보여주는 바이다. 내가 혹 타성의 물방울 속에 갇혀 정신적으로 경직되고 있지나 않은지 나는 스스로에게 물어보곤 한다. 만약 그렇다면 다르거나 낯선 것과의 만남을 두려워하거나 거부하지 말아야 하리라. 나를 가두고 있는 물방울을 깰 수 있는 것은 내 밖으로부터 내게로 다가오는 보이지 않는 그러나 은혜로운 손일 것이기 때문이다.
<한영신학대 역사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