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 교회가 있었네-창수교회] ‘쉬지 말고 기도하라’ 했는데 교회 빠지면 하나님한테 매 맞것지?
입력 2013-01-18 18:10
영광창수교회는 전남 영광군 염산면 두우리 바닷가 마을에 있다.
소를 닮은 산이 있어 창우마을이라는 이름이 붙은 곳이다. 처음에 강을 건너는 기세라는 의미를 강조해 창수(昌洙)라고 불리다가 1940년대 그런 기세가 있는 소라는 뜻의 창우(昌牛)로 바뀐 것으로 알려졌다.
이곳엔 400년 전쯤 김해 김씨들이 터를 잡고 촌락을 이루었고, 현재는 60여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다.
자식 잘되라는 기도
강추위가 주춤했던 지난 14일 창우마을에는 여전히 매서운 바닷바람이 몰아쳤다. 벼농사를 짓거나 어업으로 생계를 잇는 주민들은 칼바람을 피해 따뜻한 방안에서 쉬고 있었다. 마을에서 30분 정도면 걸어갈 수 있는 백바위 해수욕장에서 여름에 갯벌축제가 열려 사람들이 몰리지만 평소엔 인적이 드물다.
주민들의 주 수입원인 실뱀장어 잡이는 음력설이 지난 뒤에야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여기서 잡힌 실뱀장어는 양식용으로 팔려나간다. 봄, 여름에는 각각 새우, 꽃게가 한철이다. 논농사는 대농보다는 자급자족을 위한 경우가 많았다. 한 주민은 “농사보다는 어업이 돈이 된다”면서 “몸만 성하고 부지런하면 1년에 몇 천만원은 벌 수 있지만 그런 일을 할 만한 젊은 사람이 없어 주민들이 대체로 가난하다”고 설명했다.
대부분 고령인 주민들은 새벽 6∼7시부터 배를 타고 3㎞ 이상 떨어진 바다로 나가야 하는 일을 매일 하지 못한다. 고된 생업에 매여 있는 어르신들이 많은 만큼 교회에 열심히 나오는 성도도 별로 없다. 주일예배를 드리는 성도는 10여명에 불과했고 절반 이상이 여신도다.
할머니 성도들이 주일을 지키는 가장 큰 이유는 자식들을 위한 기도를 하기 위해서다. 특히 6남매를 둔 김정순(83) 집사는 자식들 걱정에 기도를 쉬지 못한다고 했다. “둘째아들은 사업하다가 잘 안 돼서 어디 가 있는지 소식도 모르겠고, 셋째아들은 머나먼 중국까지 가서 살림을 차렸다는데 눈으로 못 봤응께 맘을 못 놓겠소. 막내아들은 결혼할 사람이 있었는데 지가 거시기 하느라 시방 시기를 놓쳐서 수심이 많아부러.”
김앵례(71·여) 집사의 기도제목도 6남매 중 다섯째인 딸이 시집을 빨리 갈 수 있게 해 달라는 것. 김 집사는 “이제 설 쇠면 마흔 살 되는 딸 하나를 아직 못 여의었어. 딸은 (결혼을) 헐라고는 하는데 좋은 사람을 고르려고 그랑께…”라면서 한숨을 쉬었다.
김 집사는 출산한 뒤 관절이 심하게 쑤셔 교회에 가보라는 주변의 권유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집안에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김 집사 혼자뿐이라 신앙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그는 “교회를 처음 지었을 때 젤로 먼저 교회에 나왔는데 지금은 신앙이 별로 좋지 않다”며 “종갓집에 시집와서 나 혼자 믿으니까 어쩔 수 없이 여태까지 제사도 거르지 않고 지냈다”고 말했다.
곁에 있던 이강철(45) 담임전도사가 “앞으로 추모예배를 드리면 되니 걱정하지 말고 교회에 나오시라”고 권했다. 이 전도사는 “김 집사님은 그래도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시지만 오랫동안 유교 문화를 받들어온 마을 분위기가 남아 있어 전도가 쉽지 않다”고 했다.
소수 정예 성도들
1989년 7월 세워진 이후 제대로 보수된 적이 없는 교회시설은 꽤 낡았다. 예배당 벽에는 곳곳에 금이 나 있어 장마철에 슬레이트 지붕을 타고 스며든 비가 뚝뚝 떨어질 정도다. 겨울에는 예배당 창문을 비닐로 막지만 바닷바람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교회 화장실도 따로 없어 목사 사택의 비좁은 재래식 화장실을 성도들이 사용하고 주일에는 인근의 마을회관 화장실을 이용한다. 몸이 불편한 어르신 성도들을 모셔올 수 있는 승합차도 없었다.
교회를 세운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만 해도 예배당의 모습은 초라했지만 성도들의 기도로 분위기가 무척 은혜스러웠다. 자신들의 손으로 직접 세운 교회인 만큼 애착이 남달랐다고 한다. 초창기 성도들은 마을에서 2㎞쯤 떨어진 염산면 야월리의 교회를 다니던 주민들이 대부분이었다. 한 성도는 “교회 짓고 나서 많이 모일 땐 마을 사람이 거의 다 예배를 드렸다”며 “좁은 예배당이 가득 차서 앉을 데가 없을 정도였다”고 말했다.
기독교대한성결교회에 소속된 이 교회는 여느 시골교회와 마찬가지로 젊은 사람들이 마을을 떠나는 등 주민 수 자체가 급감해 성도들이 줄어든 측면이 크다. 특히 교회의 주축을 이루던 성도들이 하나 둘 떠나면서 교회는 위기를 맞게 됐다.
먼저 예배당을 건축할 때 큰 힘을 보탰던 박승표 집사가 20여년 전에 55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박 집사는 벽돌과 모래를 나르는 궂은일에 적극적으로 나섰고 건축 헌금을 마련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부족한 공사비를 메우느라 이 마을 출신 목회자를 서울까지 찾아가 도움을 요청해 일부 지원을 받기도 했다.
박 집사는 교회가 세워지고 얼마 뒤 위암 판정을 받았다. 한 주민은 “교회를 열심히 섬겼던 성도들이 오히려 병을 얻거나 어려움을 겪게 되자 주민들이 하나 둘 등을 돌리게 된 게 아니냐”고 말했다. 또 “우리 마을 전도왕 권사님이 서울로 이사를 가버리고 한 집사님 자녀가 또 일찍 세상을 뜨는 일까지 겹쳐서 분위기가 한동안 흉흉했었다”고 했다.
그럼에도 교회는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은혜를 주실 뿐 아니라 역경을 견뎌내도록 하는 것도 주님의 뜻이라고 믿는 ‘소수 정예 크리스천’ 덕분이다. 그중 가장 믿음이 깊은 성도는 세상을 뜬 박 집사의 아내인 김옥례(71) 권사다. “교회 일밖에 모르던 영감님이 돌아가시고 나서도 내가 교회에 계속 다니니까 사람들이 ‘미쳤다’고까지 했어. 그래도 난 교회를 떠나서는 못 살겄응께…. 교회에 안 나오면 하나님이 무슨 매를 때릴지 몰라.”
5년 전 허리를 다쳐 수술을 한 김 권사는 여전히 몸이 불편한데도 주일예배를 거르지 않고 주민들을 전도하는 일을 쉬지 않는다. 김 권사는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살전 5:16∼18)는 성경말씀이 항상 내 머리에서 안 떠난다”며 “하나님께서 항상 그러라고 하니까 기도를 쉬면 안 되는 것 아니냐”고 힘주어 말했다.
박 집사와 함께 벽돌을 날랐던 이광복(72) 집사는 한동안 교회에 나오지 않았지만 최근 마음을 고쳐먹었다. “교회를 다니려면 첫째 마음가짐이 확실해야 하는데 나는 중간에 좀 비틀어진 마음을 가져부렸어. 그랑께 쉬어버린 거지. 인자 수일 내로 교회에 다시 나가서 전도도 열심히 해야 쓰겄소. 가족들도 나한테 하직하기 전에 다시 교회에 나가라고 그랑께.”
주일학교에 빠지지 않고 참여하는 김동성(13)군도 교회의 희망이다. 어린이들이 귀한 이 마을에서 김군은 어르신 성도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다. “대기업에 취직하거나 축구선수가 되는 게 꿈”이라는 김군은 “아빠가 물고기를 더 많이 잡을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고 수줍게 말했다.
농사짓는 목회자
2007년 9월 부임한 이 전도사는 텃밭에서 수확한 상추 옥수수 고구마 등을 주민들과 함께 나누면서 복음을 전할 기회를 넓혀갔다. 처음에는 거리를 두던 주민들도 전라도 사투리를 완벽하게 구사하면서 다가오는 그에게 차츰 마음을 열었다.
이 전도사는 또 주민들이 마을회관처럼 사용할 수 있도록 교회를 완전히 개방했다. 어린이들을 위해 교회에 책과 놀이기구, 미술도구 등을 마련해놨고, 복사기와 팩스도 어르신들이 언제나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또 혼자 사는 어르신 집에 보일러나 세탁기 등이 고장 나면 선뜻 달려가 도움을 드렸다.
벼, 고추, 마늘 등을 재배하는 이 전도사는 그러나 “목회자가 목회에 집중하지 않고 논밭을 일궈서야 되겠느냐”는 오해를 산 적이 있다. 이런저런 뒷얘기에도 그는 “좀 더 열심히 복음을 전하겠다”고 다짐했다. 자신의 어려운 상황을 구구절절 주민들에게 설명하지 않았다. 목회자로서의 근본을 지키면서 꾸준히 전도한다면 언젠가 주민들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굳은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4남 2녀 중 넷째인 이 전도사는 전남 신안군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중학교에 다니면서 금속 가공 공장에 다닌 그는 기계에 왼손을 다쳐 장애 2급 판정을 받았다.
고향에서 농사를 짓던 이 전도사는 막연히 선교사의 꿈을 꾸다가 뒤늦게 신학을 공부했다. 2002년 전남신학교(기성)를 나와 2005년 목회신학연구원을 졸업한 뒤 전남 신안군 자은제일교회 등지에서 사역하다 이 교회에 부임했다. 그는 “중간에 다른 일을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결국 하나님께서 목회를 하라고 여기까지 이끌어주신 것 같다”고 말했다.
이 전도사는 뇌졸중을 앓고 있는 어머니와 언어장애로 불편을 겪고 있는 둘째 형님을 모시고 산다. 몸이 약한 강정미(41) 사모는 최근 건강이 크게 악화돼 10여일간 병원신세를 지기도 했다. 누나가 아픈 사모를 도와 두 살, 다섯 살짜리 자녀들을 돌봐준다.
“마을 사람들이 서로 의지하고 진심으로 기도할 수 있는 ‘주의 몸을 세워가는 공동체’를 만드는 게 올해 우리 교회의 비전입니다. 당장 세속적인 축복이 없더라도 하나님을 섬기면서 영혼이 성장하고 늘 감사하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주민 모두가 느낄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창수교회 가는 길
서울에서 승용차로 출발할 경우 4시간30분 정도 걸린다. 서해안고속도로를 이용해 영광IC까지 가서 영광IC 삼거리에서 ‘함평, 영광’ 방면으로 좌회전, 23번 국도를 타고 6㎞ 이동한다. 단주사거리에서 영광고속버스터미널 방면으로 800여m 간 뒤 칠거사거리에서 염산 방면 808번 지방도로를 타고 14㎞ 가서 우회전, 77번 국도를 탄다. 야월삼거리에서 ‘영광, 신성’ 방면으로 진입해 400m쯤 간 뒤 두우 방면으로 좌회전해 창우로를 따라 2.4㎞ 가다보면 우측에 교회가 보인다.
영광=김경택 기자 ptyx@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