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발굴 문화재’ 족보 만든다

입력 2013-01-17 19:39


일제강점기,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고 소위 문화통치 홍보를 위해 경주 서봉총 등 전국 곳곳이 고고학 조사를 명분으로 파헤쳐졌다. 금관 벽화 등 출토된 유물은 통치 선전에 이용했지만 고고학 조사의 기본인 발굴보고서는 남겨지지 않았다.

광복 이후 68년 만에 처음으로 당시 유적조사 책임 기관이었던 조선총독부박물관의 공문서와 유리건판(유리로 된 사진촬영 필름), 발굴 유물 등 46만여점에 대한 대대적인 역사 기록 재조사 작업이 이뤄진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이달부터 향후 10년에 걸쳐 연 5억원씩 총 50억원을 투입하는 초대형 프로젝트가 될 것이라고 17일 밝혔다.

조사 대상은 유적 보고서와 도면 등 603권 26만쪽에 달하는 공문서, 민속·고고·풍속 연구에 도움이 될 3만8000장의 유리건판, 그리고 토기 장신구 등 16만여점의 발굴품이다. 이것들은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에서 70년 가까이 햇빛을 보지 못한 채 보관돼 왔다. 김영나 관장은 “공백기로 남았던 일제강점기 발굴 문화재 족보가 최초로 만들어지는 셈”이라며 “일제에 의해 왜곡·변질된 우리 문화 유적의 가치와 의미에 대해 제대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고 말했다.

◇일제가 남기지 않은 기록을 찾아서=일찌감치 1900년부터 식민 지배를 위해 한반도에 대한 고고학·인류학 조사를 실시했던 일제는 1915년부터 조선총독부박물관을 설립, 산하 고적조사위원회를 통해 본격화했다. 특히 고도(古都)인 경북 경주와 고령, 충남 부여와 공주, 평양 등지를 중심으로 초대형 무덤 등 중요 유적 수백건의 발굴 조사가 실시됐다. 신라 금관의 경우 총 5점이 발굴됐는데, 이 중 3점이 일제 때 발굴된 금관총 금령총 서봉총에서 나왔다.

무엇보다 일제가 전국 땅을 파헤쳐 놓고 제대로 된 발굴 보고서를 남기지 않았다는 데 큰 문제가 있다. 통일신라 대표 무덤 양식인 돌방무덤 연구를 보면 총 11건의 발굴 중 정식 보고서가 발간된 경우는 2건에 불과하다.

정식 보고서도 허술하기 짝이 없다. 1934년 경주 황남리 109호분, 황오리 제14호분을 발굴해 작성한 ‘소화 9년도 고적 조사보고’의 경우 여기서 무더기로 나온 토기 사진은 실렸지만 그 내용에 대해선 한 줄도 쓰지 않았다. 윤상덕 학예연구사는 “토기를 통해 무덤 조성연도를 추적할 수 있고, 수량을 통해 무덤 주인의 계급도 알 수 있지만 안타깝게도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고 말했다.

◇그동안 왜 정비 못 했나…향후 계획은=조선총독부박물관의 각종 기록과 유물은 광복을 맞으면서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전됐다. 현재까지 이에 대한 연구는 리스트만 나열한 일제 ‘유물 목록집’ 2권(1996∼1997), 도면만 모은 ‘도면집’ 6권(1998∼2011)이 전부다.

국립중앙박물관이 6·25전쟁 때의 부산 피란 등 7차례나 이사를 다닌 것과 무관치 않다. 1960년대 이후 경제개발과 함께 증가한 발굴 수요를 감당하느라 우선순위에서 밀리기도 했다. 정부 인식 부족으로 예산과 인력이 부족한 것도 원인이다. 앞으로 국립중앙박물관은 공문서와 원판사진 분석에 주력할 방침이다. 발굴품도 깨진 건 보존처리하고, X선 성분 분석과 실측 작업을 거쳐 종합보고서를 발간할 예정이다. 경주, 부여, 공주, 대구, 김해 등의 국립지방박물관도 작업을 함께한다.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