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켓이 정해진 궤도를 벗어난다면? 美 은둔 작가 토마스 핀천 ‘중력의 무지개’ 초역

입력 2013-01-17 19:10


미국의 은둔 작가 토마스 핀천(75)의 대표작 ‘중력의 무지개’(도서출판 새물결)가 국내 초역 출간됐다. 핀천이 1973년 발표한 이 작품은 현대 영미문학을 논할 때 꼭 읽어야 할 소설로 꼽혀왔지만 물리학과 수학이론을 포함한 수많은 과학용어를 적절히 번역할 역자를 찾지 못해 국내에 소개되지 못하다 40년 만에 카이스트 수학과 출신의 엔지니어 이상국(43)씨에 의해 초역됐다.

‘중력의 무지개’는 탈도 많고 말도 많은 작품이다. 1974년 미국 최대의 문학상인 ‘내셔널 북어워드’ 시상식장. 수상자는 핀천. 사람들은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당시 37세의 핀천이 시상식에 나올 것을 예상했으나 무대에 등장한 건 핀천의 대리인인 무명의 코미디언 어윈 코리였다. 그는 “핀천을 대신해 이 용돈을 잘 받겠습니다”라는 말을 남겼을 뿐이다.

이 작품은 같은 해 퓰리처상 수상작으로 내정됐으나 퓰리처상 운영이사회가 ‘허무맹랑하고 외설적’이라며 거부권을 행사함으로써 그해 소설 부문 퓰리처상은 수상작 없이 넘어가야 했다. 지금껏 핀천은 언론 노출을 꺼리는 것으로 유명한데 소설 ‘호밀밭의 파수꾼’을 두고 “J. D. 샐린저라는 필명으로 토마스 핀천이 쓴 소설”이라는 설이 나돌 정도다.

핀천은 코넬대에서 물리학을 전공한 공학도이다. 젊은 시절 보잉사에서 2년간 근무한 그는 1963년 소설 ‘브이’로 데뷔한 이래 외부와의 소통을 완전히 끊었다. 그나마 공개된 사진도 핀천이 20대 해군복무 시절에 찍은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말, 독일의 V2 로켓의 공격 하에 놓인 영국 런던에서 시작되는 ‘중력의 무지개’는 로켓의 포물선 궤적을 추적해가는 사람들을 통해 역사의 폭력적 변증법과 회귀, 인간의 숙명과 자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 작품이 문제적인 것은 늘 예정된 포물선의 경로에서 이탈하려는 불안한 발사체인 로켓과 마찬가지로 소설 역시 기존의 작법을 따르지 않고 관습을 부정하는 서사구조를 보여준다는 데 있다.

주인공 슬로스롭은 로켓이 소리 없이 다가오는 것을 감지할 수 있는 기이한 능력의 소유자다. V2가 발사될 때 그의 ‘물건’도 발사하는 현상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에게는 ‘이미폴렉스 G’라는 플라스틱성분이 주입돼 있으며, 이것 또한 로켓의 제조에도 사용되고 있었다. 핀천은 여러 에피소드들을 통해 인간의 육체와 영혼의 관계 역시 마치 로켓과 중력의 관계와 마찬가지로 일종의 기계적 관계로 이해될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그리고 이 과정을 서술하는 문학텍스트 역시 하나의 문학기계로서 항시 새로이 발전하고 진화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미네소타대에 유학 중이던 1992년, 핀천의 거의 모든 소설을 구입해 탐독했다는 역자 이상국씨는 “역사에서 버림받은 패배자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는 점이 핀천 소설의 매력일 것”이라며 “무엇보다도 과학적 진리와 인간의 삶을 연관시킨 특출난 작가”라고 말했다. 현재 과학 소설을 집필 중인 그는 10여 년 전 인터넷 포털사이트 네이버 카페 ‘영미문학산책’에 소설 일부를 번역 연재했고, 이를 눈여겨본 출판사가 수소문 끝에 이씨와 계약을 맺음으로써 이 작품을 번역할 수 있었다.

정철훈 문학전문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