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원생활 11년째 탤런트 정동환이 전하는 잘 먹고 잘 사는 법

입력 2013-01-17 18:37


아픈 기억은 쉽게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배우 정동환(64)의 경우가 그랬다.

정동환의 아내 정윤선(55)은 10대 때 ‘검은고양이 네로’를 국민가요로 히트시킨 ‘요정’이었다. 어린아이, 어른 할 것 없이 이 노래의 매력에 흠뻑 빠졌었다. MBC 9기 탤런트이기도 했던 정윤선은 1979년 가수로 본격 데뷔해 MBC 10대 가수 신인상을 받았다. ‘엽서’ ‘잊지는 못할 거야’ 등이 그녀의 대표곡이다. 정동환 못지않은 인기를 누렸다.

이들은 정동환의 지인 소개로 만나 86년 결혼했다. 그리고 정윤선은 브라운관을 떠나 전업주부로 살았다. ‘더러는 생각도 나겠지만 미련은 갖지 말아요…’로 시작되는 ‘엽서’는 청춘들을 아리게 했다. 부부는 90년대 중반부터 경기도 광주시 초월읍 학동리에서 전원생활을 하고 있다. ‘종이비행기’ 모양 목조주택은 화제를 낳기도 했다.

한데 정동환이 새해 들어 좀 생뚱맞게 ‘잘 먹고 잘 사는 법’(SBS TV) MC를 맡았다. 40여년 그의 연기 생활에 첫 MC이다. 그는 ‘탤런트’라기보다 ‘연극배우’ 이미지가 강하다. 영화와 드라마 등 장르를 넘나드는 연기파 배우다. 지금은 없어진 동아방송 성우로 첫 연기생활을 시작했다.

MC를 맡게 된 이유가 궁금해 지난 15일 그의 전원주택을 찾았다. 12년 전 지었다는 목조주택이었다. 거실 페치카 속에선 통나무가 이글거렸다. “중진 배우가 건강을 생각하는 프로그램 MC를 사연 없이 맡을 것 같진 않다”고 하자 허허 하고 웃으면서도 좀처럼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면서 “많이 먹지는 않지만 (음식 먹는 것에) 까다롭다”는 말로 섭생의 중요함을 얘기했다.

“저는 서울이 내 몸에 맞지 않았어요. 그래 어찌어찌하여 길조차 없는 이곳까지 흘러들어왔죠. 서울내기 아내가 반대했죠. 한데 여자들은 놀라운 힘을 발휘해요. 일단 마음을 두더니 시골아낙으로 ‘모드전환’이에요. 동네 할머니들 따라다니며 채취한 들판의 자연재료로 새로운 무침을 만들어 저를 먹였으니까요. 산을 헤매고 다녀 제가 걱정을 많이 했어요.”

‘웰빙 음식’에 꽂힌 ‘예쁜 아내’가 산 속을 헤매니 걱정했을 만하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지난 5일 방송된 경남 밀양의 폐암환자 사연 얘기가 나왔다. 전원생활과 유기농 음식 섭취로 암을 극복한 경우다. 정동환이 방송 현장에 투입됐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아내가 말기 암으로 사형선고 받은 얘기를 꺼냈다. 한마디 한마디가 민감한 스타의 어려운 첫 고백이었다. 그 자리에 정윤선은 없었다. 서울에 잠시 갔다고 했다.

“하나님이 한 번 더 생명을 주신 겁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개최를 기념하는 연예인 자선행사에 참여하고 일본에서 돌아온 날이었다고 한다. 아내 전화를 받고 병원에 급히 달려갔더니 의사가 “너무 늦었어요. 왜 이제 왔어요”라고 하더라는 것이다. 암 덩어리가 너무 커 시한부 선고를 받은 것.

“열어봤자(수술이) 소용없는 상황이라는 거예요. 멍해졌지요. ‘내가 연극배우인데 아내에게 뭐라고 말하지. 난 지금 공연하러 가야 하는데….’ 그는 결국 공연을 포기하고 그날 이후 미친 듯이 아내를 위해 뛰었다. 주먹만한 혹 제거수술을 감행할 도리밖에 없었다. 한데 혹을 떼어내 조직검사를 해보니 암이 아니었다. 그저 혹이었던 셈. 명백한 오진이었다.

“그 사실을 알기 전까지 아내는 암 환자였어요. 병원에서 암이라니까 암 환자처럼 정말 신체가 까맣게 변하더라고요. 그때 포기했으면 어떻게 됐겠어요? 어이가 없었죠. 주변에서 소송하자는 거 말렸습니다. 하나님의 기적이라는 말로밖에 설명을 못하겠더라고요.”

이런 그에게 ‘잘 먹고 잘 사는 법’은 단지 음식과 주거의 개념이 아니다. 양생(養生)이 가족과 공동체에 선한 영향을 끼친다는 생각이 들어 매회 프로그램마다 단단한 공부로 진행한다고 한다. “설탕과 조미료 들어간 음식을 싫어해요. 아내의 음식 솜씨가 뛰어나 그 덕을 좀 보죠. 음식 솜씨는 배운다고 되는 게 아닌 것 같던데요. 하하.”

거실 천장엔 늦둥이(현재 고교 1년)를 위해 설치했다는 구름다리가 매달려 있었다. “사람이 포기하면 죽는다 싶더군요. 저는 늦둥이 때문에 포기라는 말 못해요. 고1 이잖아요. 그 아이에 맞춘 아빠여야죠. 잘 먹고 잘 살려면 어떤 어려운 경우가 닥치더라도 포기하면 안 됩니다.”

정동환

서울 후암동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도서관이 귀한 시절, 남산도서관 개관 두 번째 입장자라고 자랑했다. 서울예술전문대학교 졸업 후 전무송 이호재 등 내로라하는 연극인과 바닥에서부터 연기를 배웠다. 73년 일본 오키나와 사탕수수밭에서 시급 노동자로도 일했다. “시급이 당시 우리나라 일당 수준이었는데 거기서 번 돈으로 연극판 생활하다 돈 떨어지면 또 나갔다”고 회고했다. 이런 기질은 80년대 미국에 가서도 주경야독으로 이어졌다. 막노동으로 학비를 벌며 ‘리 스르라스버그연극학교’에서 연기를 공부했다. 81년 김수용 감독의 영화 ‘만추’에 김혜자와 함께 주연배우로 출연했다. 정윤선과의 결혼은 당시 세간의 화제였다. 2녀 1남.

전정희 선임기자 jhje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