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김희성] 기분 좋은 날

입력 2013-01-17 18:45


그런 날이 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이유 없이 기분 좋은 날. 현관문을 열었을 때 촉촉한 아침 공기와 보드라운 햇살이 마음까지 부드럽게 만져주는 날. 그런 날이면 특별히 노력하지 않아도 상냥한 딸, 친절한 시민이 될 수 있는데 평소에 보기 힘든 눈웃음과 애교는 자동옵션이다.

그날도 그런 날 중 하루였다. 오랜만에 만난 맑은 하늘 때문인지, 착한 얼굴로 대문 앞에 앉아 밥을 기다린 삼색 고양이 때문인지, 정확한 원인 분석은 불가하나 어쨌든 골목을 울리는 내 구둣발 소리가 탭댄스라도 추고 있는 듯했다.

“어서 오세요.” 택시 기사님의 인사말에 활짝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네. 안녕하세요.” 행선지를 말하자 아저씨는 힘주어 “고맙습니다”라고 하시더니 웃으면서 기분 좋게 출발하셨다. 다소 뜬금없는 답례에 영문을 몰라 애매하게 웃으며 넘어가려는데 아저씨가 백미러 너머 초승달 모양으로 웃어 보이시며 고마움의 이유를 설명해 주셨다.

“손님 앞에 탔던 젊은 양반한테 좀 안 좋은 소리를 들었습니다. 아침부터 퉁퉁 부은 얼굴로 한숨만 푹푹 쉬고 있어서 무슨 걱정 있느냐 물었더니 상관 말고 운전이나 똑바로 하라 그럽디다. 내가 괜한 참견을 했구나, 아차 싶긴 했지만 그래도 ‘그냥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조용히 가고 싶습니다’ 이렇게 점잖게 말해도 될 것을. 차문이 떨어져나갈 정도로 쾅 닫고 내리는데 기분이 착 가라앉는 것이 참 그렇습디다. 그 기분 그대로 다음 손님한테 이어가면 못쓰지 싶어 기분 좀 띄워보려고 라디오 노래도 따라 불러보고 했는데 그게 잘 안 되더라고. 근데 이렇게 손님이 활짝 웃어주니까 금세 기분이 좋아지는 게 힘이 납니다. 허허. 손님이 나쁜 기분을 싹 몰아내줬나 봐요. 그러니까 고맙지.”

하루 종일 사람을 태우고 달리고 또 사람을 찾아 달리는 것이 일인 사람. 택시 기사가 직업인 아저씨는 짧게는 5분 길게는 1시간 정도 함께 가는 손님을 기왕이면 웃으면서 내리게 하고 싶다며 소박하게 웃어 보이셨다.

일본 속담에 ‘웃으며 보낸 시간은 신들과 함께 지낸 시간이다’라는 말이 있다. 세상에 악한 웃음이란 있을 수 없으니 내가 웃는 시간 동안은 선한 신과 함께한 시간인 셈이다. 나이, 성별, 직업도 다양한 ‘나’가 타고 내리는 택시. 어쩌면 우린 미터기에 찍힌 주행거리만큼 돈을 지불하고 덤으로 나의 시간과 기분을 두고 내리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선한 신과 함께한 시간, 좋은 기분을 남기고 내리는 것이 낫지 않을까.

김희성(일본어 통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