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이영미] 박근혜 정부여서 할 수 있는 일
입력 2013-01-17 18:44
대선이 끝난 지 꼭 한 달.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의 대표 복지공약들이 뭇매를 얻어맞고 있다. 속도조절론에서 시작한 새누리당 내부반발은 “할 수 있는 걸 골라내자”는 선별론, “그런 약속 한 적 없다”는 발뺌을 거쳐 공약 수정이 공언되는 상황으로까지 번졌다. 16일에는 “복지공약에 새누리당 추계보다 105조원이 더 든다”는 국책연구기관의 용감한 발언이 보태졌다. 애초부터 못 지킬 약속이었다는 걸 실토하시지. 안팎에서 목을 죈다.
주요 표적 중 하나는 기초연금이다. 기초연금은 모든 노인에게 매월 일정액의 보조금을 주는 노인수당이다. 지금도 만 65세 이상 노인에게 정부가 돈을 주긴 한다(기초노령연금). 박근혜표 기초연금의 핵심은 ‘모든’에 있다. 강남부자와 재벌회장까지 ‘모든’ 노인을 수혜자로 끌어안았다. 놀라운 건 이 지점이다. 모두를 위한 보편복지 정책이 정치지형의 가장 오른쪽에서 제기돼 오직 그곳에서만 설전이 치열하다.
‘복지는 구빈제도가 아니라 사회안전망’이라는 믿음에서 출발한 게 보편복지이다. 이 말을 국민적 유행어로 만든 건 무상급식 논란이었고, 최초 발원지는 진보정당이었다. 국민들은 지난 몇 년 무상급식을 둘러싼 찬반이 서울시장을 갈아 치우는 메가톤급 정치적 스캔들로 비화되는 걸 지켜봤다. 무상급식 예산은 지난해 말 기준 1조9000억원. 나라를 뒤흔든 무상급식 논쟁의 가격표가 2조원이라면, 기초연금에 걸린 돈은 무려 13조1970억원(2014년 기준)이다. 새누리당의 대통령 당선인이 진보진영의 정책이슈를 받아들여 13조원짜리 노인복지 시스템을 만들겠다니 깜짝 놀랄 사건이다.
며칠 전 통합진보당의 한 의원실에서 ‘기초연금이 세대갈등과 사회혼란을 조장한다’는 내용의 성명을 냈다. 야권의 다른 관계자는 기초연금을 “진정성 없는 공약”이라며 평가절하했다. 국민연금을 끌어들여 사회적 논란을 촉발시킨 뒤 그걸 명분으로 현재 9만7100원인 기초노령연금을 한 푼도 안 올릴 심산이라는 것이다. 이런 말을 덧붙이긴 했다. “우리도 기초연금이 실현된다면 좋겠습니다만.”
누군 찬성하고 누군 반대하고, 결국 역할 나눠 하는 소극 아닌가. 보수층의 반발기류가 심상치 않으니 야권 인사가 그렇게 의심할 소지가 없진 않다. 하지만 목청껏 보편복지를 외쳐온 진보진영에서 정작 판이 벌어진 지금, 팔짱 끼고 “어디 잘하나 보겠다”는 식으로 나오는 건 온당한 일인가.
물론 기초연금은 획기적인 만큼이나 폭발적인 이슈이다. 특히 재원 일부를 국민연금에서 가져다 쓰겠다고 말한 순간, 국민연금이라는 판도라의 상자가 함께 열렸다. 국민연금 보험요율, 연금지급액 등 이해 당사자들의 설전은 더욱 치열해질 거다. 그럴수록 같은 목표를 향한 협력과 지원은 절실하다.
크리스토프 폴만 독일 프리드리히에버트재단 소장은 독일 복지에 경쟁을 도입하는 우파 개혁이 게르하르트 슈뢰더의 중도좌파 정부에서 성공했다는 사실을 지적하며 이런 말을 했다. “복지를 늘릴 때는 보수 성향 정부가 사회적 합의 도출에 더 유리할 수 있습니다.”
노인빈곤은 우리 사회가 인내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다. 좌우를 넘어 동의하는 현실이다. 행여 자식들에게 누가 될까, 조용히 목숨을 끊는 노인들. 어떻게든 그들을 도울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폴만 소장의 말을 빌리자면, 갈등 비용을 최소화하며 빈곤노인을 도울 황금열쇠를 쥔 건 박근혜 정부일 수 있다. 그 방향에 동의한다면 돕지 못할 이유가 없다.
이영미 정책기획부 차장 ym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