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정진원 (13) 한 정치인 찾아와 “회장님 장학금 받고 이렇게…”

입력 2013-01-16 18:32


얼마 전 50대 초반의 한 정치인이 나를 찾아왔다. 뉴스에서 종종 보긴 했지만 나와 무슨 관계가 있으리라곤 생각도 못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는 “회장님, 제가 회장님 장학금 받고 공부했습니다”라면서 내게 감사의 인사를 했다. 그는 매달 받았던 장학금의 액수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고, 그 돈을 받으면 절반은 육성회비 등의 명목으로 학교에 내고 절반은 학용품을 샀다고 했다. 내가 사줘서 태어나서 처음으로 돈가스를 먹어봤는데, 그 맛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고 이야기했다. 그의 어머니는 젊은 나이에 남편을 여의고 서울로 올라와 시장에서 행상을 하며 4남매를 키웠다.

솔직히 나는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내가 모교인 우신초등학교 앞에 약국을 개업했을 때 청소년선도위원을 하면서 모교 후배들에게 장학금을 줬던 기억은 어렴풋이 났다. 액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세세한 것들까지 모두 기억하고 있었고 큰돈도 아니었는데 지금까지도 고마워하고 있었다. 하지만 감사한 건 오히려 나였다. 이처럼 훌륭하게 성장해서 나를 기억하고 찾아주니 아주 큰 선물을 받은 기분이었다. 그날 저녁 하나님께 뜨거운 감사 기도를 드렸다.

선친은 생전에 “남을 위한 일은 미루지 마라. 선한 일을 뒤로 미루지 마라”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 돈을 많이 번 다음에, 생활이 안정된 다음에 하는 식으로 미루다 보면 기회를 영영 놓칠 수도 있다. 그래서 나도 사회생활을 시작하자마 얼마 안 되는 적은 돈이었지만 장학금으로 내놓았다. 이후 로타리클럽 등 여러 단체에서 활동할 때도 장학사업은 빼놓지 않고 챙겨왔다.

서울지검 남부지청 범죄예방협의회장을 맡고 있을 때인 1997년 말쯤 나를 부끄럽게 만든 사람이 있었다. 연화자씨라는 분이 불우청소년교육기관인 성지고를 찾아 어려운 학생들을 위해 장학금으로 써 달라며 1000만원을 내놓았다. ‘영등포시장 커피아줌마’로 불리던 그는 16년 동안 영등포중앙시장에서 조그만 수레를 끌고 다니며 커피와 차를 팔아왔다. 고생 끝에 작은 가게와 세 칸짜리 전세방을 마련하자, 어려울 때 다짐한 일을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젊어서 남편과 사별한 그는 살기 위해 아이들을 보육원에 보낼 수밖에 없었다. 3년 만에 겨우 방 한 칸을 마련해 꿈에도 그리던 아이들을 데려왔다. 그때 ‘언젠가 자리를 잡으면 형편이 어려워 제대로 보살핌을 못 받는 아이들을 돕겠다’고 굳게 결심했다. 연씨는 커피행상 시절 음식을 나눠주던 식당주인, 동사무소에서 라면과 구호물품을 받을 수 있도록 알려준 이웃들의 고마움을 잊지 못해 동사무소에도 1000만원의 불우이웃돕기 성금을 기탁했다. 작은 일에도 감사할 줄 알고, 넉넉하지 않아도 나눌 줄 아는 그의 마음에 부끄러움이 앞섰다.

나와 성지고 김한태 교장과 김원치 남부지청장은 이 숭고한 돈을 종자로 삼아 장학기금을 만들기로 뜻을 모았다. 98년 2월 26일 KBS 공개홀을 빌려 장학회 발족식을 겸한 음악회를 개최했다. 준비하면서 “외환위기로 어려운데 잘될까” 하는 걱정들이 많았다. 하지만 음악회는 1800여명이 참석해 대성황을 이뤘고 1억5000만원을 모금했다. 남부지검에서 거의 전 직원이 모금에 동참하고, 범죄예방협의회 회원 등도 힘을 모아 그해 6억원 가까운 장학기금을 마련했다. IMF 외환위기 속에서 이룬 작은 ‘기적’이었다. 나는 남부소년선도재단이라 이름 붙인 이곳 재단의 초대 이사장으로 추대돼 10년 정도 봉사하다 물러났다. 재단은 해마다 40∼50명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할 정도로 자리를 잡았다.

정리=송세영 기자 sysoh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