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정진원 (11) 故 김수환 추기경과의 잊지 못할 아름다운 인연

입력 2013-01-14 17:43


2001년 말에는 감리교단 신문인 기독교타임즈 사장으로 선임됐다. CBS후원회장은 실질적 업무를 책임지지 않는, 명예직 비슷한 것이었지만 기독교타임즈 사장은 달랐다. 대외적으로 신문사를 대표하고 경영도 책임을 져야 했다. 언론사에 대해 잘 모르는 상태에서 중책을 맡았으니 힘에 부칠 때도 많았고 마음고생도 심했다. 하나님께 지혜를 달라고 기도도 많이 했다.

감리교단은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진 보수적 교단인데 기독교타임즈의 논조는 비판적이고 진보적이었다. 기독인이자 언론인으로서 사명감을 가진 훌륭한 기자들이 많았지만 신문이 발행되면 항의전화가 많이 왔다. 큰 교회들이 특히 더 비판을 많이 받았으니 신문에 협조적일 리 없었다. 광고수입이 없으면 신문사를 경영하기 어려운데 큰 교회들이 광고게재를 기피했다. 일일이 찾아다니며 양해를 구하고 광고를 부탁하는 게 사장의 역할이었다. 하나님 하시는 사업이니 나를 내려놓고 맡기자는 마음이 없었으면 버티기 힘들었을 것이다.

기독교타임즈 시절 기억에 남는 것은 김수환 추기경이 2002년 2월 정동제일교회에서 열린 사장 취임예배에 와서 축사를 한 일이다. 단상에 오른 김 추기경은 “제가 여기 왜 온지 아십니까. 정 장로에게 마음의 빚이 많아서 왔습니다”라며 “기독교타임즈가 크리스천 정신으로 혼탁한 세상에 밝은 빛이 되는 신문이 되기를 바란다”는 축사를 해주셨다. 추기경이 감리교단 행사에 참석하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어서 교단 원로들이 깜짝 놀랐다.

김 추기경과는 1999년 5월 설립된 재단법인 자녀안심하고학교보내기운동 국민본부를 통해 인연을 맺었다. 재단설립 당시 김 추기경은 이사장, 나는 총재를 맡았다. 설립초기 재단에는 제대로 갖춰져 있는 게 별로 없었다. 기금은 20억원 정도 있었는데 직원들 월급만 매달 1000만원 넘게 나갔다. 기금에서 나오는 수익으로 인건비까지 감당하는 건 무리였다. 별 수 없이 내 사비를 들여 재단 직원들 월급을 줬다.

김 추기경이 이 이야기를 듣고 “그렇게 사비를 쓰면 어떻게 하느냐”며 무척 미안해했다. 그리고는 “정 회장, 나는 돈 만드는 재주는 없어. 내가 광고모델을 서면 안 될까”라고 제안했다. 귀가 솔깃했다. 재단 홍보도 하고 기금도 확충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 같았다. 대형 생명보험사 사장과 직접 통화할 수 있는 기회를 얻어 김 추기경의 제안을 전했더니 “아주 좋은 아이디어”라면 반색을 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도 연락이 없었다. 전화를 걸어 “연락 주실 줄 알고 기다리고 있습니다”고 했더니, “아이고 말씀 마세요. 사장단 회의에서 이야기 꺼냈다가 점잖은 분 모델로 세워서 몰매 맞을 일 있냐고 혼이 났습니다”며 되레 하소연을 했다. 아무 소리 못하고 광고모델 출연은 없던 이야기로 했다. 이 일로 추기경께는 감사하고 죄송한 마음이 많았다. 생신 때 하얀 강아지 두 마리를 선물해드렸는데 참 좋아하셨다는 이야기를 비서수녀에게 들었다.

재단의 어려운 자금사정이 알려지면서 여러 법조인들이 발벗고 나섰다. 덕분에 국내 굴지의 대기업들이 기금을 출연해줘 재단 기금은 50억원대로 늘어났다. 2002년 아무 미련없이 총재직을 그만두고 나왔다. 김 추기경은 그때 일을 마음에 두고 있다가 내가 기독교타임즈 사장에 취임한단 소식을 듣고 부러 찾아온 것이었다. 대단한 일을 한 것도 아니었는데 그저 감사할 뿐이었다.

정리=송세영 기자 sysoh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