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방우체국-르완다 김보혜 선교사] (1) 내전 상처 치유의 손길

입력 2013-01-14 17:40


“내전 살육의 고통겪은 사람들 예수님 부활은 최고 희망”

“40년 전쯤? 1960∼70년대 우리나라와 비슷한 느낌이네요.”

어쩌다 르완다를 찾는 50대 이상의 한국인들이 말하는 첫 인상이다. 산이 많은 자연 탓인지, 식민과 내전의 역사라는 공통분모 때문인지 모르겠다. 지난 시절 고난과 낮은 자존감, 대상이 불분명한 저항감 같은 것들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이해되는 점에서 르완다는 문화적으로 가깝게 느껴지는 곳이다.

최근 5년 사이 급격한 발전으로 수도 키갈리에는 번듯한 빌딩과 가로등이 생겼지만 아스팔트 건너편에는 여전한 흙바닥 위 전근대의 삶이 공존한다. 사람 두상처럼 생긴 아프리카 지도의 중앙에 위치한 산골 나라 르완다는 열대 사막과는 다른 ‘아프리카의 스위스’라는 별명처럼 아름다운 나라다.

우기에 골짜기 위로 안개인지 구름인지 빨리 움직이는 모습을 보노라면 동화 나라에 온 듯하다. 많은 산 때문에 ‘천의 언덕, 천의 문제’로 자조 섞인 별명이 있었지만 누군가의 기지로 ‘천의 언덕, 백만의 미소’로 바뀌었다. 르완다에는 작은 두상에 치열이 고른 사람들이 많기에 사람들의 미소를 보고 지은 듯하다. 피부색 때문에 얼굴로는 여간 의중을 알아보기 힘들다. 처음에는 시무룩한 표정이 무섭기까지 하다가 인사 한 마디 건네면 금세 하얀 이를 다 쏟을 듯 웃으며 세상만사 걱정 없이 늘 “노 프라블럼(no problem)”을 외치는 순수한 모습이 된다.

많은 선교사들처럼 나도 ‘예수’ 영화를 상영하며 많은 산봉우리들을 헤매면서 르완다를 발로 살고 있다. 낯선 이에게 거침없이 구걸의 손을 내미는 어른과 아이를 보며 우리 모두가 존귀한 하나님의 형상임을 확신시키고자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10)는 말씀을 외우게 한다. 이 말씀은 한국인들이 겪은 고난과, 고난 속에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했던 믿음의 선진들, 오늘의 축복을 주신 하나님을 증언해야 할 책임도 깨닫게 하는 것 같다.

2007년부터 전기 없는 시골, 산골 교회에 다니며 아이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고자 ‘허미’ ‘미라클 메이커’ 등의 만화영화에 르완다의 언어인 키냐르완다어 자막을 얹어 상영했다. 만화영화를 처음 보는 아이들이 벌레 캐릭터가 말을 하는 것을 보고는 너무 놀라고, 글을 못 읽는 이들로 인해 어수선해져서 지금은 키냐르완다어로 더빙된 ‘예수’ 영화를 주로 상영하고 있다.

이 사람들은 연극, 영화를 좋아한다. 며칠 세미나를 하거나 지방 교회 방문을 하면 성경을 배경으로 짧은 드라마를 하는데 과장된 몸짓의 탁월한 표현력에 감탄할 때가 많다. 관객들의 호응도도 최고다. 바다가 없는 나라여서 물고기가 흔치 않다. 따라서 베드로의 그물이 찢어질 지경이 되는 장면에서 퍼덕거리는 물고기를 보면 영화를 보고 있다는 생각은 잊는 듯하다. 그리 좋을까. 모두들 자신이 베드로인 듯 행복해한다.

또 자주 접하는 장면인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장면에 이르면 성경을 통해 익히 알겠건만 극도로 고통스러워 뛰쳐나가거나 기겁을 하는 경우도 있다. 처음에는 예수님의 고통을 동일시하는 순수한 믿음이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더욱 반응이 격렬해서 물었더니 1994년 내전으로 80만명이 학살당할 때 가족이 살해되는 것을 목격했던 사람들이 예수님의 고난 장면에 기억이 오버랩돼 고통스러워한다는 것이었다.

어쩌랴. 골짜기마다 처절한 학살의 상흔이 깊이 자리잡은 곳. 그리도 선하고 착한 미소로 어떻게 이웃을 살해했을까. 하긴 그들은 지금 감옥에 있겠지? 혹시 들키지 않고 거리를 활보하는 건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누구도 못 믿을 것 같아 마음을 다스리게 된다.

어찌 보면 학살 이후 근 2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에는 누구든 고통스러운 역사의 피해자인 것 같다. 더불어 살아가는 인간세상에서 피차를 신뢰할 수 없는 인간관계 이상의 피해가 어디 있을까. 그 누가 이 땅 깊이 새겨진 고통을 송두리째 치료할까. 억울한 죽음, 기막힌 손실. 그래서 더더욱 강조하는 것이 예수님의 부활이다. 우리 모두가 부활의 소망이 없다면 어떻게 그리스도인이라고 할까만 극한 죽음의 공포를 뚫고 나온 르완다 사람에게는 십자가 이후 예수님의 부활은 최고의 치료요, 희망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운명하는 장면에 넋을 놓았던 사람들이니 우리 죄를 담당하신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는 기도를 하는 순간에는 저절로 자리에서 일어나 함께 고백하는 것 같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는 장면에서는 “아라라라라”하고 소리를 치며 환호하고, 부활하신 주님이 바로 지금 이곳에 나타나 그들을 만지시는 듯하다.

이렇게 날마다 이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선명히 경험되는 셈이다. 하루 종일 적도 위 뜨거운 해 아래에서 예배를 드려 살이 익어버린 날 바나나숲에서 마른 바나나잎을 방석으로 멋진 자연의 창조주 하나님을 자연스레 찬양하던 날의 감격이 있다. 흰 천을 사용해 영화를 상영하다 보면 사방에서 뚫고 들어오는 강한 햇살에 화면은 다 날아간다. 그런데도 이들은 그저 소리만 들려도 빛이 통해버린 흰 천 위로 뭔가를 보는 듯 집중한다. 울퉁불퉁한 현무암 틈새로 발을 재빨리 구르고 춤추며 몇 시간의 환호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모습을 보면 내가 선교사로서가 아니라 이들의 믿음의 학습자로 이곳에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나무만 대충 엮은 교회에 손님이 온다고 급히 흙을 발랐던 게 설교하는 내 머리로 툭툭 떨어지던 날, 뚫린 틈새로 하나님이 직접 보고 계시는 특혜를 누린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이런 교회들을 찾아다니다 보니 지붕이 없는 교회는 지붕을, 예배드릴 장소가 없는 곳에는 교회를 건축하고 가난한 사람들이니 염소도 나누게 되었다. 한 달에 1∼2회는 지방 교회를 방문하는데 컴퓨터나 발전기, 스피커가 고장나고 해서 1년 뒤 다시 방문하기도 한다. 때론 교회가 협소해 모두를 수용할 수 없어 2∼3회 연속 상영을 하느라 밖에 줄지어 서 있기도 하고, 교회에 도착하니 차를 둘러싸고 흔들어대는 아이들 때문에 잠시 차에 갇혀 있다가 목회자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교회에 들어간 일도 있었다.

자신이 주인공인 영화는 어떨까. 예배를 마치고 영화 상영을 준비하며, 아이들 사진을 부지런히 찍어서 스크린에 띄워 보여주는데 변변한 자기 사진이 없는 아이들이 스크린에 자신의 얼굴이 나온 것에 감격스러워한다. 특히 자신들이 춤추며 찬양하던 동영상을 보면 쑥스러움인지, 입을 살짝 가리고 옆의 친구들을 쿡쿡 찔러가며 행복해한다. 이런 모습을 보며 하나님이 우리 삶을 보여주실 때 이렇게 마냥 행복하면 좋겠다는 소망을 가져본다. 이런 산골짜기마다에 헌신된 목회자들이 있어 감격스럽고, 미래를 끌어갈 아이들이 많으니 그 아이들을 복음 안에서 바로 가르쳐야 할 책임감을 느낀다.

건축 중인 교회의 틈새로 빛이 너무 들어와 그걸 차단하다가 돌이 떨어져 아이 머리에 맞아 피가 나는데도 영화를 꼭 보아야 한다며 눈물 꾹꾹 눌러가며 교회 안으로 다시 들어왔던 아이, 콩고 난민 캠프의 어두운 교회에서 찬양을 인도하던 7살 여자 아이, 그리고 많고 많은 아이들이 예수님 때문에 행복하기를 바라며 나는 아이들에게 집중하기 시작했다.

김보혜 선교사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여의도순복음 소속 선교사

·1959년생, 순복음신학교, 서울신대, 미국 오럴로버츠대 졸

·2006년 10월 파송

·르완다 오순절교단과 협력해 키갈리에서 독신으로 사역

·에이즈 환자 심방, 빈민층을 위한 구제사역, 유치원 설립, 신학교 강의, 예수영화 사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