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운 아침 동네 쓰레기 줍고 귀가하다 버스에 치여… 봉사 속에서 떠난 81세 ‘당산동 봉사왕’
입력 2013-01-13 19:48
지난 7일 오전 8시15분. 서울 당산동에 사는 김계순(75) 할머니 휴대전화에 ‘남편’ 표시가 뜬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한 시간 전에 집을 나선 남편이 전화를 한 것이 의아했지만 김 할머니는 별 생각 없이 전화를 받았다. 휴대전화 너머에선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영등포 경찰서 경찰관이라고 밝힌 그는 할머니에게 그날 아침 할아버지가 입고 나간 옷이 무엇인지를 물었다. 할아버지는 매일 아침 ‘영등포구 노인봉사대’가 적힌 노란 조끼를 입고 봉사활동에 나섰다. 할머니가 ‘노란조끼’라고 답하자 경찰은 “할아버지가 머리를 조금 다쳤으니 병원으로 와 달라”고 했다.
임득실(81) 할아버지는 이날 서울 당산동 일대에서 쓰레기를 줍는 봉사활동을 하고 귀가하는 길에 신호를 위반한 버스에 치여 고인이 됐다. 김 할머니는 “그날 아침도 추우니까 집에서 쉬라고 말렸는데…”라며 말문을 잇지 못했다.
5년 전부터 임 할아버지는 당산동 일대에서 쓰레기 줍기나 아이들 등굣길 건널목 안전도우미 봉사활동을 했다. 막내아들 태희(41)씨는 “아버지가 봉사활동을 하고 계신 줄도 몰랐다”며 “워낙 무뚝뚝하던 분이라 좋은 일을 하는 사실을 자식들에게까지 티 내지 않으셨다”고 말했다. 둘째아들 대희(47)씨는 “젊은 시절 너무 고생하셔서 나이 드신 이후에 지역사회에 봉사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신 것 같다”고 전했다.
할아버지는 서울 영등포에서만 50년 넘게 살며 몇 년 전까지는 가락시장에서 농산물을 팔았다. 젊은 시절 가난으로 고생해 절약하는 습관이 밴 탓인지 본인을 위해 돈을 쓰는 일은 거의 없었다. 태희씨는 “돌아가시기 한 달 전쯤 눈이 많이 내려 미끄럼 방지 운동화를 사 드렸는데 ‘신던 신발이 있는데 왜 새 운동화를 사느냐’며 놔두고 신지 않으셨다”며 “자신에게 인색하지만 이웃에게는 따뜻했던 아버지였다”고 말했다.
동네 사람들은 그를 ‘봉사왕’으로 기억했다. 이웃 신유리(38·여)씨는 “초등학교에 다니는 딸이 할아버지를 뵙고 ‘봉사왕’이라며 인사했더니 활짝 웃으셨다”며 안타까워했다.
올 3월 할아버지는 팔순잔치를 앞두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지 일주일이 지났지만 아직 남은 일이 많다. 보상 관련 절차도 밟지 못했고, 피의자로부터 진심 어린 사과도 듣지 못했다. 태희씨는 “좋은 일 하다 돌아가셨는데, 정작 마지막 가는 길이 고통스러우셨을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고 말했다.
한편 서울 영등포경찰서는 피의자인 버스운전사 이모(50)씨를 구속했다. 경찰 관계자는 “이씨가 교통사망사고를 낸 전력이 있다”며 “이번에도 신호 위반으로 피해자를 숨지게 했지만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범행 일부를 부인했다”고 밝혔다.
김유나 기자 spri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