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포커스-양기호] 일본 왕실과 여성
입력 2013-01-13 18:58
일본 매스컴에서 조심스러운 3대 ‘터부(taboo)’가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일본왕실, 야쿠자, 중국이다. 신문이나 방송에서 노골적으로 다루면 다치거나 심지어 죽을 수도 있다. 그러나 중국이나 야쿠자는 한물 간 느낌이다. 센카쿠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 영토분쟁으로 다투고 있는 일본은 거의 매일처럼 중국에 대한 비난을 쏟아내고 있다. 일본사회의 음지를 지배해 왔던 야쿠자도 단속이 심해지고 거품경제가 꺼지면서 존재감이 희미해졌다. 야쿠자임을 나타내는 문신 새긴 사람들도 목욕탕에서 보기 힘들다.
그러나 왕실만은 아직까지 건드려서 안 되는 성역으로 남아 있다. 전전(戰前)에 일왕 모욕은 불경죄라는 거의 반역죄로 다루었다. 전후, 1960년 12월 ‘중앙공론’에 ‘풍류몽담’이 연재되면서 왕세자비가 암살된다는 그냥 소설에 화난 우익이 출판사 사장을 습격해 중상을 입힌 사건은 충격을 던졌다.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일본 매스컴은 자주규제라는 명목으로 왕실에 대한 비판, 비난은 자제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왕실도 일반국민과 가까워지고자 노력해 왔다. 지금 미치코 왕비나 마사코 왕세자비 등 민간인 여성을 세자비로 간택한 것이다. 결혼을 통해 국민과 친근한 왕실을 연출하고자 했다고 할까.
영국 귀족의 대표격인 영국왕실에 비해 일본인들은 천황제가 일본문화 자체라고 여긴다. 신화와 전설, 생활과 문화 모든 것에 스며들어 있다는 것이다. 일본 건국신화에 따르면 모든 일본인은 수천년이나 바뀌지 않은 만세일계(萬世一系) 왕실의 후손에 해당한다. 영국왕실이 다이아몬드나 유명 화가의 작품, 대토지 등 엄청난 재산을 가지고 있음에 비해 일본왕실 재산은 대부분 국가소유물이다. 의상이나 가구는 소박하며, 화려함과 거리가 멀다. 일왕 부부도 3·11 대지진 등 피해 지역이나 장애인 등 소외계층을 자주 찾는다. 그만큼 많은 일본인들은 왕실에 존경심과 친근감을 가지고 있다.
문제는 왕실 내 고민이 심각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 46년 동안 일본왕실에서 태어난 8명이 모두 딸이다. 아들이 아닌 딸들은 결혼 후 왕족이 아닌 민간인 신분으로 바뀐다. 딸부잣집 왕실에서 왕족 수가 줄면서 이래저래 걱정이 많다. 나루히토와 마사코 왕세자 부부는 11년 전 아이코(愛子)라는 여아를 출산한 뒤 아들을 낳지 못한 채 올해 만 50세로 접어들었다. 배를 따뜻하게 해서 임신에 좋다는 인삼을 한국에서 수입해 먹었다는 소문도 있다.
엘리자베스2세 여왕이 통치하는 영국이라면 문제가 없다. 아들이건 딸이건 왕위를 계승할 수 있다. 그러나 일본은 다르다. 1889년 메이지헌법과 동시에 제정된 왕실전범에서 왕위는 남자 왕족의 아들만이 계승할 수 있다. 마사코 왕세자비가 남자 왕손을 낳지 못하자 여왕제 도입 논쟁이 일었다. 고이즈미 전 총리는 왕실전범을 개정해 여왕승계 가능성을 검토하도록 지시했다. 2006년 무려 41년 만에 일왕 차남인 아키시노미야 부부가 아들 히사히토를 얻자 여왕 논쟁은 가라앉았다. 작년 말 취임한 아베 총리도 기자회견에서 남자만이 왕위을 계승하는 현행 왕실전범을 바꾸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남자 왕손을 낳아야 하는 중압감에 시달려 온 마사코 왕세자비는 정신적으로 힘들다. 스트레스가 심해져 공무를 포기하고 두문불출한지도 거의 10년째다. 일본왕실은 그저 적응장애라고 설명해 왔지만 10년이나 그런 상태라면 우울증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본격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아키히토 일왕은 올해로 만 80세에다 협심증 수술까지 받아 건강이 좋지 않다. 왕위승계 서열 1위인 나루히토 왕세자 부부는 조만간 왕위를 이어받을 가능성이 높다. 지금도 그렇지만 일단 왕에 등극하면 많은 정무와 접견, 국정행사에 부부가 참가해야 한다. 우울증 증상이 심해진 마사코 왕세자비가 이러한 환경을 이겨낼지 미지수다. 이래저래 일본왕실의 고민은 깊어가고 있다.
양기호(성공회대 교수·일본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