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남혁상] 입양

입력 2013-01-13 18:58

입양의 역사는 인류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 입양 관련 최고(最古) 기록은 고대 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 법전에 있다. 고대 로마제국의 아우구스투스 황제,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 비잔틴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1세 역시 양자였다.

우리나라도 삼국시대에 양자제도가 확립됐을 만큼 입양 역사의 뿌리가 깊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입양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가계 혈통을 잇는 수단에 불과했다. 따라서 입양 대상은 남자 아이들에게만 해당됐다.

입양에 아동복지 개념이 처음 도입된 것은 독립전쟁과 이민 러시로 고아가 양산됐던 1800년대 중반 미국에서다. 뉴욕아동구호협회 소장이던 찰스 로링 브레이스는 1859년 획기적인 ‘고아 열차(orphan train)’ 운동을 시작했다. 뉴욕 시내를 헤매는 아이들을 열차에 태워 각 지역에 입양시킨 것이었다. 1900년대 초반까지 계속된 이 운동으로 20만명 이상이 입양됐다. 상당수는 당당한 가족 구성원으로 성장했고, 일부는 사회지도층이 됐다. 하지만 일부는 농장 인부로 전락하는 등 부작용도 있었다.

입양은 1·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한층 활성화됐다. 전쟁고아가 사회문제로 등장하자 유럽 각국은 본격적인 입양 관련법을 마련해 자국은 물론 다른 나라 고아들까지 입양했다.

우리나라의 해외입양 역시 한국전쟁 직후 전쟁고아들을 상대로 이뤄졌다. 1961년에는 고아입양특례법이 제정돼 법적 근거와 절차가 마련됐다. 다만 혈통을 중시하는 뿌리 깊은 사회 인식 탓인지 국내 입양은 선진국에 비해 활성화되지 못한 듯하다.

최근 몇몇 나라에서 입양이 사회 이슈로 떠올랐다. 얼마 전 러시아에선 미국과의 정치적 갈등 속에 미국인의 러시아 아이 입양을 금지하는 대미인권법이 발효됐다. 이 법 때문에 지난해 말 미국 입양이 결정됐던 러시아 고아 46명의 미국행이 좌절됐고, 아이가 오기를 학수고대했던 미국인 부부들의 꿈도 사라졌다.

우리나라에선 입양특례법 개정 이후 오히려 버려진 아기들이 크게 늘고 있다. 신고제에서 허가제로 바뀌고, 입양 전 출생신고를 먼저 하도록 관련법이 개정된 탓이다. 입양아동 기본권을 보장하는 헤이그협약 정신은 좋다. 하지만 개정된 법이 출생기록을 남기고 싶지 않은 미혼모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한 결과라는 비판은 끊이지 않는다. 복지국가를 지향하는 2013년 천사 같은 아기들이 길거리에 버려진다는 사실이 창피하지도 않은가. 세심한 대책 마련이 절실한 때다.

남혁상 차장 hsna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