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정진원 (10) 임직원 노력에 기독교서회 6개월만에 흑자 기록

입력 2013-01-13 17:54


감량경영을 원칙으로 해서 직원을 48명으로 정예화했다. 다행히 기독교서회의 부채는 회관에 입주한 업체들의 전세보증금 등이어서 이자가 발생하지 않는 것이었다. 오랜 역사와 전통이 있는 기독교서회에서 책을 내는 것은 큰 명예였기에 이런저런 경로로 출간을 부탁하는 분들이 적지 않았는데, 정중하게 설명을 드리고 양해를 구했다. 서회 직원들의 노력과 이사들의 협조로 1996년 상반기 기독교서회는 흑자를 기록했다.

평신도로서 교계 정치를 잘 모르던 내게 교계 연합기관의 대표는 결코 쉽지 않은 자리였다. 기독교서회 이사회는 주요 교단에서 파송된 신망 있는 분들로 구성돼 있었다. 감리교단에서 나를 사장으로 추천해 이사회 표결을 거쳐 선출되긴 했지만 다른 교단 파송 이사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작은 성과도 내기 힘들었을 것이다.

이사로 모신 분들 중에는 훌륭한 분이 많았다. 점잖고 신실했던 신촌성결교회 정진경 목사님과 붓글씨를 써주곤 하시던 광주제일교회 한완석 목사님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한 목사님이 은퇴하신 뒤 “요즘 어떻게 소일하십니까”하고 전화 드렸더니 “요즘 이 교회, 저 교회 다닙니다”고 하셨다. “왜 섬기던 교회 나가시지 그러십니까”하고 여쭸더니 “목사님께 부담 주기 싫어서 안 나갑니다”고 했다. 목사님의 대쪽같은 성품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감리교단에서는 광림교회 김선도 감독에게 마음의 빚을 졌다. 사장으로 선임되자마자 이사회에서는 소속 교단장의 재정보증이 필요하다고 했다. 당시 감독회장이던 김 감독을 찾아갔더니 “우리 감리교에서 처음으로 기독교서회 사장을 맡으셨는데 도와드려야죠”라면서 비서를 불러 도장을 찍어주셨다. 보증이라는 건 위험이 따르게 마련인데 선뜻 허락하시는 걸 보고 ‘참 그릇이 크신 분이구나’하고 감탄했다.

기독교서회에서는 좋은 책이 많이 나왔다. 그중 가장 귀한 책은 57년 창간돼 지금도 발행되고 있는 월간 ‘기독교사상’이 아닌가 싶다. 신학 공부하는 사람들의 필독서로서 ‘기독교사상’을 인용하지 않으면 학위 논문을 쓸 수 없을 정도였다. 예일대 등 해외 명문 대학 도서관에도 비치돼 있을 정도로 권위를 인정받았다. 미국에서 발행되는 포켓용 묵상집인 ‘다락방’의 한국어판도 내용이 참 좋았다. 특히 군인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기독교서회 사장 임기는 4년이었지만 2년도 채우지 않고 그만뒀다. 당시 감리교단의 김동완 목사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총무로 있었는데 연임을 희망하고 있었다. 당시 감리교단은 NCCK와 기독교서회, 기독교방송 등 3대 연합기관 가운데 두 곳을 맡고 있어 논란이 됐다. 내가 그만둬서 다른 교단에서 오신 분이 서회를 맡도록 하면 논란이 수그러들 것이라 생각됐다. 첫 평신도 출신 전문경영인으로서 서회를 위해 내가 해야 할 급한 일들은 마무리된 상태였다. 건강을 이유로 그만둔다며 이사회에 사직서를 제출했다.

이사 중 한 분이 찾아와 “장로님, 꼭 그만두셔야겠습니까”하고 물었다. “건강이 여의치 않아서 더 이상 못 하겠습니다”고 했더니 “순교하는 마음으로 더 하시면 안 되겠습니까”라고 되물었다. 그래도 내가 사퇴한 이유를 자세히 설명드리지 못했다. 지금도 죄송한 마음이 남아있다. 퇴직금도 사양하고 바로 물러났다.

기독교서회 사장에서는 물러났지만 1998년 나는 CBS기독교방송 후원회장으로서 한국교회 연합기관을 위해 한 번 더 봉사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선친과 함께 CBS 이사로 활동하셨고 당시 CBS 이사장으로 계시던 표용은 감독이 요청한 것이어서 기쁘게 받아들였다.

정리=송세영 기자 sysoh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