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웅 목사의 시편] 우울한 시대를 보면서

입력 2013-01-13 17:46


영화 ‘레미제라블’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뜨겁다. 400만을 넘어서 500만에 가까운 관객이 모인다고 한다. 나도 감동적으로 보았지만 솔직히 이 정도로 흥행하리라는 생각은 못했다. 왜냐하면 그 스토리는 전혀 생소한 것이 아니라, 이미 익숙하게 잘 알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이 ‘레미제라블’ 이야기에 뜨겁게 호응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무언가 새롭게 접한 이야기에서 받는 감동이 아니라면, 그러면 무엇일까?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이미 잘 알고 있지만, 어쩌면 진정으로 다시 듣고 싶은 이야기를 듣게 되는 반가움의 감동이 아닐까? 익히 알고 있지만 또다시 듣고 싶은, 아니 반드시 들어야만 되는 심적 상황이 관객들의 반응을 이끌고 있는 것이 아닐까?’ 무슨 뜻인가? 그동안 사람들은 따뜻한 용서의 이야기를 너무도 듣고 싶어한 것이다. 고귀한 사랑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했고, 인간 존엄의 이야기를 또다시 듣고 싶어한 것이다.

최근 전직 유명 야구선수의 자살소식이 사람들의 마음을 힘들게 하고 있다. 한 가족의 연쇄 자살소식에서 사람들은 비단 그 가족의 슬픔만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우리 시대 모두가 느끼는 우울함을 함께 느끼며 공감하고 있다. 고달픈 삶의 무게가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 중학생 큰 딸이 학교에서 독서토론을 하고 와서는 엄마를 붙들고 갑자기 울음을 터트렸다. 이유인즉 함께 토론한 친구들의 말이 너무도 비관적이더라는 것이다. 친구들은 하나같이 스스로 불행하다고 느끼고 있으며, 세상이 망했으면 좋겠다는 말을 스스럼없이 하더라는 것이다. 행복해야 할 친구들의 우울함을 보는 것이 내 딸에게 너무도 서글펐나 보다. 현대인들은 기대고 싶어하고 안기고 싶어한다. 나는 ‘레미제라블’의 이야기에 사람들이 호응하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내심 지치고 고달픈 마음의 짐을 어디에선가 풀어놓고 싶었던 것이다.

D M 헨더슨은 ‘요한 웨슬리의 소그룹사역’에서 웨슬리 당시 영국을 조명하기를, ‘영국의 18세기는 산업적으로는 최고의 시기인 동시에 도덕적 사회적으로는 최악의 시기’라고 말한다. 산업혁명이 경제호황을 안겨주었지만, 동시에 수많은 극빈층 노동자의 처참한 삶과 도시의 도덕적 타락은 동시대의 개혁가들을 절망하게 했다는 것이다. “개혁가들은 그 타락상에 절망하며 두 손 두 발을 다 들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아주 중요한 지적을 한다. “그러나 요한 웨슬리는 똑같은 상황을 보면서 전도의 때가 무르익었음을 보았다.”

우울한 위기의 시대는 어쩌면 사람들이 정말로 듣고 싶은 이야기를 해줄 수 있는 기회가 아닌가? ‘레미제라블’에 호응하는 우울한 시대를 보면서 우리가 느낄 것은 없는가?

<서울 내수동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