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자가 전하는 북한의 한국방송 시청… 南 드라마 모르면 간첩, 영상물 대놓고 돌려봐

입력 2013-01-11 18:49


지난 2006년 함경북도 청진시 청암구역 문화중학교. 청암구역 당위원회는 학생들의 가방을 불시에 검열했다. 그랬더니 한 학급 43명 중 35명에게서 알판(CD)이 나왔다. 위원들은 ‘가을동화’와 ‘천국의 계단’ ‘투캅스 1·2부’를 비롯해 ‘007시리즈’ ‘미녀 삼총사’ ‘단독항쟁’ ‘취권’ ‘정무문’ 등 여러 나라의 드라마나 영화가 담겨있는 걸 확인하고 깜짝 놀랐다. 학생들은 빌려간 알판을 돌려주려고 갖고 오기도 했고 서로 바꿔 보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서 빌려오기도 했다. 그런데 당위원회와 학교 당국은 이 학생들을 처벌할 수가 없었다. 학생들 가운데는 아버지가 구역당 일꾼이거나 외화벌이 사장, 보안원, 검사 등 간부 자식들이 많았던 것이다.

2009년 10월에도 비슷한 일이 발생했다. 북한의 최고 지성들만 모인다는 김일성종합대학에서 불시 검문을 실시했다. 책가방과 소지품 검사를 했는데 학생 1만8000명 가운데 2000여명이 한국 영상이 담긴 CD와 USB를 갖고 있었다.

탈북자 김모씨는 “한국 드라마와 영화를 담은 영상물을 돌려보는 일은 북한의 대도시와 군 단위에 걸쳐 비일비재하다”며 “간부나 중산층 가정의 경우 한국의 영화나 드라마를 밤새 시청하는 사례도 많다”고 전했다.

김씨는 “한국 영화나 드라마를 자기 가족이나 친척, 친구, 마을 사람들과 함께 관람하곤 했다”며 “우리 마을에 50세대가 넘는 집들이 있었는데 어느 가정이라 할 것 없이 거의 모든 주민들이 남한 영화나 다른 나라 영화를 봤다”고 말했다.

탈북자 장모씨에 따르면 황해남북도와 평안남도 등 북한 일부 지역에는 한국 TV 시청도 가능하다. 여유가 있는 주민들은 일본이나 중국제 중고 텔레비전을 중국에서 사들여 시청하고 있다. 이는 NTSC 방식의 남쪽 신호를 잡을 수 있는 TV가 외국산밖에 없기 때문이다. 북한에서 거래되는 중국산 액정TV는 최저 35만∼50만원(북한 화폐)에 달한다. 북한 일반 근로자의 한 달 월급이 2500∼3000원 정도인 것을 감안하면 외제 TV 소유는 일반인에겐 그림의 떡이다.

북한 주민이 최신 디지털TV나 수신 장비를 구하기는 더욱 어렵다. 1000달러가 넘는 디지털TV는 구입하기도 어려울 뿐 아니라 구입한 사실이 들통나면 국가안전보위부의 표적이 되기 때문이다. 지난해 중국 단둥에서는 한국의 아날로그 방송 송출 중단에 대비해 북한 부유층이나 간부층이 중국산 TV를 찾아 몰리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북한 주민들은 TV보다 라디오를 더 많이 듣는다. 북한에서 의사 생활을 하다 13년 전 탈북한 박모(70)씨는 90년대 초반 러시아에 갔다가 구입한 라디오전축으로 남한 소식을 접했다고 한다. 하지만 외국에서 라디오를 구입하면 입국심사대에서 채널 고정 장치를 달아야 한다. 라디오 내부의 튜닝 장치에 테이프나 납땜 봉인을 해 조선중앙통신 외에는 들을 수 없도록 한 장치다.

박씨는 주로 새벽 4시쯤 일어나 테이프 봉인을 뜯고 채널을 돌려 남한 방송을 들었다. 주로 KBS라디오 뉴스를 청취했다. 볼륨을 최대한 줄여 스피커에 귀를 바짝 갖다대고 들었다. 그가 아직도 기억하는 것은 ‘5공비리’ 수사 관련 소식이다. 박씨는 라디오를 들은 뒤엔 다시 테이프를 조심스레 붙였다. 박씨에 따르면 90년대까지 북한에서는 전 세계 16개국 전파가 잡혔고 그중엔 한국의 KBS도 포함돼 있었다.

지난 2010년 4월 NK지식인연대 대북정보센터가 탈북자 300명에게 설문조사한 결과, 북한주민들은 한국 영상물로 영화와 드라마(40%), 다큐멘터리 및 교양시사물(20%), 음반이나 뮤직비디오(20%), 전자도서(10%), 만화(5%), 게임 및 학습 프로그램(5%) 등을 접하고 있었다.

NK지식인연대 김흥광 대표는 “북한 주민들은 한국 영상물을 통해 폐쇄적인 북한 체제의 본질을 인식하고 외부세계를 새롭게 이해하고 있다”고 말했다. 황해남도에 살았다는 탈북자 최모(57)씨도 “뉴스를 듣거나 드라마, 영화 등을 시청하면서 남한에 대한 인식이 변했다”며 “남한 TV방송은 북한 주민의 희망”이라고 말했다.

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