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염성덕] 현대판 사략함대
입력 2013-01-11 18:16
에스파냐(스페인)는 16세기 유럽에서 가장 부강한 나라였다. 서반구의 바다가 에스파냐의 영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막강했다. 무적함대라고 불리는 해군과 항해기술을 보유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에스파냐의 정부 수입은 영국보다 6∼8배가량 많았다고 학자들은 추산한다. 이 수입에는 에스파냐가 해외 식민지에서 수탈해온 황금은 제외됐다고 한다. 그것까지 포함하면 에스파냐의 국부가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다.
에스파냐가 욱일승천할 당시 영국은 2류 국가에 불과했다. 영국은 해상무역을 통해 국부를 축적하려고 했지만 해군력이 뒷받침되지 않았다. 해군을 육성할 정부 재정도 빈약했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사략함대(私掠艦隊)였다.
사략선(私掠船)은 정부로부터 적선을 공격하고 나포할 권리를 인정받은 민간선박을 말한다. 역할은 해적선과 비슷하지만 정부의 나포면허장을 받았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영국은 사략선들로 사략함대를 편성해 에스파냐의 대양무역 독점 구조를 깨려고 한 것이다.
사략선 선주나 투자자들은 적선을 나포한 뒤 배와 화물을 팔아 엄청난 이익을 취했고 일부를 국고에 편입시켰다. 사략선의 주 무대는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의 선박들이 식민지 물산을 본국으로 운반하는 길목이었던 카리브해였다. 사략선장, 해적선장, 탐험가 사이를 넘나들었던 영국인 프랜시스 드레이크가 에스파냐 선박을 나포해 금은보화 등 화물을 사략선에 옮겨 싣는 데만 나흘이 걸렸다고 한다.
사략선의 원조인 영국에서 민간함대를 창설해 소말리아 해적 퇴치 활동에 나선다고 영국 선데이타임스가 최근 보도했다. 영국에서 200여년 만에 현대판 사략함대가 부활하게 된 것이다. 1만t급 모함과 고속경비정 등으로 편성된 민간함대는 3∼4월쯤 첫선을 보인다. 기관총, 저격무기 등을 갖춘 민간함대는 해적과 교전하기보다는 해적의 접근을 차단하는 임무를 맡는다. 민간함대를 운영할 영국 벤처기업 타이폰은 해병대 전역자 등 함대 근무 인력 240명을 모집하고 있다.
각국이 소탕 작전에 나서고, 민간함대까지 등장해 소말리아 해적들이 갈 곳을 잃게 됐다. 소말리아 젊은이들이 동경했던 ‘해적산업’이 사양산업이 될 날도 머지않은 것 같다.
염성덕 논설위원 sdyu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