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문병길] 영화 ‘레미제라블’ 속의 진리
입력 2013-01-11 20:37
반세기전 중학교 국어선생님으로부터 들었던 장발장에 대한 아련한 기억이 떠올라 영화 ‘레 미제라블’을 보았다. 문학자나 언론에서는 주인공 장발장의 질곡의 인생행로를 통해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원초적 한계를 보여주는 대작으로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작가 빅토르 위고는 그 이상의 인간의 모습을 얘기하고 있다. 그는 진리를 발견한 지혜자임을 본다. 작가는 주인공 장발장의 독백을 통해 ‘내가 누구인가(Who am I)’를 찾아가는 진리의 근본을 대주제로 하고 있다.
예수님을 재판하고 십자가 사형에 넘겨준 빌라도는 ‘진리란 무엇인가’라는 인류의 가장 큰 주제에 대해 질문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답을 얻지 못한 채 기독교인들의 신앙고백인 사도신경에 기록됨으로써 역사에서 매일, 매시간 반복되는 가장 불쌍한 저주의 이름이 되었다. ‘레 미제라블’의 뜻은 바로 ‘비참한 사람들’이다. 내가 비참한 사람이요, 장발장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아는 것이 진리를 아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제시하신 예수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 14:6)고 말씀하신 유일한 분이다.
우선 시대적 배경이다. 레 미제라블은 프랑스의 시민혁명을 통해 정부군과 혁명군의 싸움을 다루고 있다. 암울한 시대적 배경은 오늘이라고 해서 별로 나아진 것이 없다. 성경 속에 흐르는 역사는 하나님의 역사와 인간의 역사가 공존하고 있다. 결국 그리스도인은 내가 누구인지를 발견함으로써 하나님의 역사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이라는 세상에서 벗어나는 싸움과 같은 것이다.
아울러 장발장의 인생노정은 나그네의 길을 대표하고 있다. 노동자인 장발장은 누이동생과 조카들의 배고픔 때문에 빵을 훔침으로써 그것이 원죄가 되어 험난한 길을 가다가 은촛대를 내어준 신부와 무고한 사람이 자기를 대신해 감옥으로 끌려가는 모습을 보고 자신이 죄수 24601이라고 밝히면서 회개함으로써 그 이후 코제트를 통해 새로운 길을 간다.
그리고 장발장이 죄인임을 밝히려고 추적하는 자는 자베르 경감이다. 어느 날 수레바퀴에 깔린 한 남자를 구하는 장면을 보고 달아난 죄수 장발장을 연상하는 등 그가 죄인임을 끝까지 추적하지만 자베르는 자신의 정의에 대한 원칙이 장발장의 자비와 사랑이라는 것에 무너지자 결국 세느강에 투신해 자살한다. 이것이 바로 율법이다. 율법은 인간들이 자신이 누구인지를 모르고 있기 때문에 이를 알도록 주어진 것이다. 이는 율법을 대표하는 모세가 요단강 건너 가나안 땅을 바라보고 죽은 후에 후계자인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건너는 모습과 같다. 예수라는 이름은 ‘여호수아’요, ‘주 여호와 구원자’이다.
마지막으로 장발장의 임종을 지켜보는 코제트와 마리우스의 젊은 부부다. 장발장에게 이제까지 숨겨진 진정한 사랑의 모든 것을 듣고 혁명을 위해 목숨을 바친 젊은이들과 함께 마지막 노래를 부르면서 대단원은 막을 내린다. 이것은 부활을 상징한다. 바로 장발장이 다시 사는 부활이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새로운 사람으로 살아야 함을 내면으로 하는 위대한 문호의 ‘광야의 소리’이다. 더욱이 사랑하는 코제트는 양딸이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은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다…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롬 8:14~15) 나는 양자로서 하나님의 아들이다. 영화관을 떠나면서 눈물을 감추며 작가가 살아 있다면 ‘형제’라고 부르며 포옹이라도 하고 싶었다. 아멘.
문병길 목사(종교근본주의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