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의 희망지기-윤형주] “인생의 마침표, 하나님께서 찍도록 맡겨야”

입력 2013-01-11 17:56


자전적 회고록 ‘나의 노래, 우리들의 이야기’ 펴낸 윤 형 주 장로

‘가수, 작곡가, 방송인, 기업가, 공연기획가, 민족시인 윤동주의 6촌 동생….’

윤형주(65)를 설명할 수 있는 여러 단어가 있지만 인생 후반을 사는 요즘 그의 삶을 한마디로 규정하는 것은 ‘장로 윤형주’다. 1970년대 통기타 시대를 꽃피운 ‘영원한 청년’이자 감미로운 목소리의 의대생 가수로 유명했던 그의 인생은 신실한 신앙고백으로 채워져 있었다. ‘세시봉 열풍’을 담은 그의 자전적 회고록 ‘나의 노래, 우리들의 이야기’(삼인)에도 ‘하나님’ ‘성경’이 자연스럽게 여러 번 등장한다. 기독교 서적도 아닌데 내용의 절반 정도가 신앙과 연관된 이야기다.

95년 서울 온누리교회 장로로 장립된 그는 활동하는 모든 분야에서 신앙을 기꺼이 드러낸다. 봉사활동에 나설 때나 사업 파트너를 만날 때도 그는 기도했고, 공연장이나 세시봉 친구들 모임장소에서도 기도했다. 신앙인으로서의 그의 면모를 잘 나타내는 사례지만 여기엔 사연이 있다.

“(조)영남이형이 ‘무릎팍도사 이장희 편’에서 제 얘기를 했는데, ‘형주는 6촌 형 윤동주 시도 못 외우는 데다 목소리는 염소소리 같다’는 말을 했어요. 우리가 주일학교 때부터 같이 자라온 세월이 52년인데 이상한 소리나 하고. 화가 나 방송국에 설 특집에 안 나간다 통보했더니 전화가 와요. ‘형주야, 정말 미안하다. 죽을죄를 졌어. 재밌게 하려던 거지 다른 뜻은 없다.’ 대꾸를 안 하니 형이 조심스레 한마디 해요. ‘형주야, 근데 넌 장로잖아. 난 평신도고. 장로가 평신도를 품어야 하지 않겠어.’ 할 말이 없대요. 웃고 품지 않을 수 없었지요.”

세시봉 모임 전 기도는 이때부터 시작됐다. 장로임을 강조해 면죄부를 받은 조씨는 그를 볼 때마다 ‘윤 장로’로 부르기 시작했다. 세시봉 설 특집 공연 전에도 조씨는 전 스텝을 모아놓고 윤씨에게 대표기도를 부탁했다.

“이 일 뒤로 10여명이 모이는 세시봉 친구들 모임 때마다 형이 매번 제게 대표기도를 권해요. 세시봉 방송이 낳은 선물 가운데 하나가 이 기도 습관입니다. 모임에 제가 있는 한 기도하거든요.”

하나님의 시나리오

윤씨는 애국과 신앙을 강조하는 독립투사 가문에서 자랐다. 문인으로 경희대 학장을 역임한 아버지 윤영춘씨는 아들이 신앙과 나라를 위해 분투했던 가풍을 고스란히 이어받길 바랐다. 66년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한 그에게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하도록 권유한 것도 아버지였다.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세워진 학교이자 민족시인 윤동주의 모교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들은 청진기보다 기타가 더 좋았다. 그는 노래를 부르기 위해 자주 수업을 빠지고 무대에 올랐다. 환자의 생명을 살려야 하는 아들이 노래를 부른답시고 술집 무대에 오르는 걸 보기 싫었던 아버지는 아들을 쉽게 통제하기 위해 68년 자신이 교수로 있던 경희대 의대로 옮겼다. 당시 교육시스템으로는 가능한 일이었다. 송창식씨와 결성한 트윈폴리오로 큰 인기를 모으고 있을 때였다. 트윈폴리오를 해체하고 은퇴선언도 했지만 그는 무대를 잊을 수 없었다. 윤씨는 71년 심야 라디오 방송 DJ로 방송에 복귀했고 이어 솔로앨범을 냈다. 반응은 폭발적이어서 그가 공개방송을 진행할 때마다 수천명의 소녀들이 몰려들었다. 언론은 그를 비롯한 세시봉 출신 포크 가수들을 차세대 스타로 주목했다.

“통기타 문화의 개척자로, 시대의 영웅으로 인기도 얻고 돈도 적지 않게 벌었습니다.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 크리스마스 때 광화문에서 방송이 끝나면 방송국 앞에 고위층 자제를 태운 자동차가 줄지어 서 있었어요. 제게 선물을 주거나 파티에 데려가려고 서 있는 차들이었죠. 청와대에서 경호원을 붙여준 적도 있지요. 당시 대통령 아들이 날 좋아했거든.”

그러던 그가 한 순간에 범죄자로 전락했다. 대마초 파동에 연루된 것이다. 생일날 받았던 선물과 편지 가운데 대마초가 들어 있던 게 화근이 됐다. 그는 28살이던 75년 12월 2일 대마초 소지죄로 체포됐다. 이장희 이종용 등 동료가수와 영화배우, 개그맨 등도 그와 같은 혐의로 줄줄이 구속됐다.

“대마에 대한 개념도 없던 때였습니다. 의대에서 배운 대로 ‘향정신성약물’이란 것만 알았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몰랐죠. 피우지도 않았고요. 그래서 도망가거나 둘러대지 않고 생일날 받은 선물 가운데 하나라고 솔직하게 말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사대주의와 허무주의라며 통기타 문화를 나라에서 요주의 문화로 보고 있었기에 제 진술은 좋은 쪽으로 반영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윤씨는 4개월간 서대문구치소에서 사형수, 강간미수범, 소년수, 각종 잡범과 함께 생활하는 신세가 됐다. 이들은 서로 자신의 범죄경력을 자랑하듯 이야기하곤 했다. 6명을 죽이고 구치소에 들어온 사형수는 아직 한 명을 죽이지 못했는데 잡혔다며 말할 때마다 눈에서 살기를 내뿜었다.

“하나님이 원망스러웠습니다. 대마 말고도 얼마나 큰 죄가 많아요. 살인자도 있고 영혼을 파괴하는 사람도 있는데 내가 무슨 피해를 줬기에 이렇게까지 돼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 왜 당신은 하필 내게 이런 시나리오를 주느냐며 따졌죠. 박수를 보내던 언론이 범법자로 절 손가락질합니다. 더 이상 이런 시선 속에서 살아갈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런 윤씨를 구원한 건 면회 때 어머니가 건네준 성경책이었다. 은밀히 유리조각을 구해 손목을 긋고 자결하려던 어느 날, 받자마자 바닥에 던져 둔 성경책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모태신앙인 그였기에 성경은 가장 친숙하고 잘 아는 책이라 생각했는데 읽어보니 그렇지 않았다. 성경 말씀 한 구절 한 구절이 새롭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성경을 읽으면서 제 인생을 되돌아봤습니다. 인생의 주인이 저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습니다. 인생뿐 아니라 제가 가진 모든 것도 제 소유가 아니었고요. 모든 건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이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제 목소리가 그 증거죠. 아름다운 목소리는 얻고 싶다고 얻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거죠. 그렇다면 주신 분의 목적이 있을 것 아닙니까? 부와 명예 인기와 성공이 아닌, 제 목소리가 필요한 곳에 절 보내겠다는 하나님 시나리오를 죽음의 문턱에서야 깨달았습니다.”

희망의 노래

76년 세상으로 다시 돌아온 윤씨는 가장 먼저 목소리 재능기부에 나섰다. 감옥에서 이사야 43장에서 ‘너는 내 것이라’란 말씀을 발견하고부터 목소리를 하나님께 드리기로 서원했기 때문이다. 교회 주일학교 교사부터 봉사를 시작한 그는 한국 십대선교회와 홀트학교에서 이사와 후원회장으로 모금활동을 했다. 특히 장애인 단체나 병원, 호스피스에서 봉사활동을 많이 했다. 의사였다면 이들의 장애나 질병의 고통을 덜어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대마초 사건 이후 다니던 의대를 중퇴하고 무대에도 설 수 없었던 그는 광고계로 전업했다. 작곡 솜씨를 살려 CM송을 잇달아 유행시키고 해외 가수 공연도 기획하면서 다시 예전처럼 바빠졌지만 시간을 쪼개 봉사와 강연, 후원행사에 참여했다. 교도소도 꾸준히 찾아 자신의 수감생활을 전하며 재소자를 격려했다. 갇힌 자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현재 윤씨는 한국해비타트를 포함해 23개의 단체에서 봉사활동을 한다. 1년 평균 10번쯤 해외에서 공연이나 간증집회를 열거나 선교활동에 참여한다.

“지금도 포화 상태라 정리를 해야 하긴 하는데 정리할 곳이 없어요. 다 도움이 필요한 곳이죠. 그래서 시간을 쪼개서 하는데, 요즘 체력이 떨어져서 예전보단 힘들긴 하죠. 그렇다고 하기 좋은 것만 할 수 없잖아요. 하나님이 이루길 원하는 일이면 힘들어도 마지막엔 기쁨과 보람이 와요. 지난해에도 케냐에 의료선교를 다녀왔는데, 의사도 아닌 제가 뭘 할 수 있겠어요. 그저 시다(보조원) 노릇만 실컷 했죠. 그런데도 다녀오면 가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하나님 일이 대개 그런 것 같아요.”

강연과 공연활동에도 열심이다. 그는 봉사나 사역뿐 아니라 공연에서도 지친 영혼을 위로해 줄 수 있다고 믿는다. 가수는 무대에서 노래만 하는 것으로 역할이 끝난다고 보지 않기 때문이다. 윤씨에게 노래는 하나의 메시지다. 그의 체험과 삶의 철학이 고스란히 담긴 하나의 이야기다.

“세시봉 공연 피날레 곡은 제가 작곡한 ‘우리들의 이야기’란 곡이예요. 아버지가 중학교 입학 기념으로 라일락 화분을 선물했는데 대학생이 되니 그 나무가 자라 지붕 위에서 향기를 내더라고요. 그 향을 맡으면서 단숨에 가사를 썼지요. 저는 이 곡을 부르기 전에 청중에게 ‘훗날 자녀에게 감동이 될 만한 일을 하라’고 말해요. 명문 대학 가라고 강요만 말고, 대학 마당가서 손잡고 기도하는 게 낫다는 식이죠. 노래에 묻어난 이야기대로 자녀, 가정, 꿈, 고통 가운데 배양된 신앙을 이야기하면 많이들 위로를 받고 힘을 내는 것 같아요. 제가 그분들의 영혼을 어루만지는 일을 하고 있다 느낄 때 굉장히 보람을 느낍니다.”

그래서 그는 세간에서 자살 소식을 접할 때마다 안타까움을 느낀다.

“살다보면 억울하고 분노할 일이 생깁니다. 근데 자살은 그 분노의 화살을 다 자기에게 쏘는 거예요. 인생의 마침표를 스스로 찍는 거죠. 그런데 아직 끝나지 않았거든요. 마침표는 하나님이 찍어야 해요. 우리는 하나님이 쓰는 시나리오 선상에 있는 사람이에요. 예수가 못 박혀서 살린 귀한 목숨들이죠. 정체도 모르는 이들이 쓴 인터넷 댓글에 상처 받는 대신 스스로가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를 인식해야 합니다.”

65세, 윤형주의 꿈

윤씨는 ‘꿈’이란 단어를 가장 좋아한다. 그는 꿈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꿈이 없는 민족은 죽은 민족이고, 꿈이 없는 자녀는 죽은 자녀’란 표현을 즐겨 사용했다. 또 꿈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기회와 능력도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난다고 말했다. 2003년 미국 뉴욕 카네기홀에서 가족콘서트를 연 것도 하나님께서 주신 꿈에서 출발한 것이라 설명했다.

아직도 그는 가진 꿈이 많다고 했다. 근래엔 ‘세시봉 컴퍼니’란 회사를 세울 계획이다. ‘뮤지컬 세시봉’ 제작을 위해서다. 45년 통기타 문화를 개척한 세시봉 가수들의 우정과 애환을 뮤지컬로 엮어 후세에 물려주는 게 그의 꿈이다.

선교에 대한 꿈도 밝혔다. 윤씨는 향후 중앙아시아에 저소득층 아이들이 다닐 수 있는 학교를 세우고 세계 각지를 돌며 교회와 선교사를 물질과 재능으로 돕는 순회선교사가 되고 싶다고 했다.

“한류는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에게 복음의 문을 열어준 거나 다름없어요. 실크로드를 건너 무슬림에 갈 수 있는 방법은 한류밖에 없다고 봐요. 우리 문화가 세계를 뒤집어 놓으면, 크리스천 스타들로 복음이 전해질 날이 올 겁니다. 그리고 그 일을 곧 설립되는 세시봉 컴퍼니가 감당할 거고요. 문화가 창세기적 사명을 감당하는 그날까지 저는 계속 기도하고 꿈꿀 것입니다.”

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